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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대문 여는 소리 / 주영준

부흐고비 2020. 4. 2. 10:16

대문 여는 소리 / 주영준


​ 내가 어렸을 때 아침 일찍 대문을 여는 것은 할아버지의 일과였다. 방문이 훤하게 밝아오면 벌써 마당에는 할아버지의 큰 기침소리가 나고 이내 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 식구들은 기상신호를 들은 듯 모두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제일 늦게 일어난 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나가 보면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할아버지는 문 밖에 서서 막 산머리를 벗어난 아침해를 바라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문을 열어놓아야 복을 많이 받는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은 사람들이 맘대로 드나들 수 있게 낮에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면서 눈, 비가 오는 날도 여전히 일찍 열어 놓으셨다. 동네 집들도 다 문을 열어놓고 살았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대로 집집을 드나들면서 마음도 함께 터놓고 다정하게 지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문 여는 일은 아버지가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를 물려주기 전에 대문 열어 놓는 일은 끝이 나고 말았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에는 풍습도 인심도 옛대로 남은 것이 없었다. 대문을 열어 놓고 살던 시대는 옛이야기로 흘러가고 각박해진 세상은 집집마다 높은 담에 철망을 두르고 대문은 낮에도 빗장을 걸어 놓았다. 나도 대문을 잠그고 살면서 밖에 나갈 때는 문 잘 잠그라고 당부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사람들은 문과 함께 마음까지 잠그고 이웃끼리도 인사 한번 안하고 산다.

나는 지금 대문이 없는 아파트에서 마루 끝에 단 철문 한짝을 여닫고 산다. 손님이 가실 때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전송한다. 편해서 좋기는 하지만 앉은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은 답답함과 협착감을 면할 길이 없다. 대문은 의복에서는 관이고 사람으로는 얼굴이 아닐까. 그래서 인지 우리 조상들은 대문을 지극히 신성시했다. 도성에는 시구문을 따로 만들어 시체가 대문으로 나가는 것을 금했고 관가나 가정에서는 파장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지방에는 남아있는 풍습이지만 외지에 나가 객사한 시체는 대문을 통하지 않고 담을 깨고 들여온다. 옛날은 부모의 상을 당해 장례 날까지 당도하지 못한 불상죄인도 담을 뚫고 들어갔다고 한다. 또 사사로운 일로 현감을 만나는 사람은 동헌 담에 뚫린 구멍으로 출입했다고 한다. 이처럼 담을 깨고 출입한 것을 파장문이라고 했다. 또 대가에서는 아녀자나 하인들은 뒷문이나 쪽문으로 출입했다하니 대문은 명분 없고 떳떳치 못한 사람이나 잡인들은 출입할 수 없는 당당한 곳이었다. 대문을 정문이라 하는 연유도 짐작이 간다.

어제는 차를 타고 단독주택 단지가 있는 마을을 지나면서 할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남향집에 동향대문으로 된 집을 으뜸으로 치는데 3대 적선을 해야 그런 집에 산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마을은 하나같이 그런 방향으로 줄지어 있었다. 그 말씀대로 라면 이 사람들은 모두 3대 적선을 한 후손들일까. 빈집처럼 꼭꼭 닫혀 있는 대문들을 보면서 이들의 삼대 후손을 생각해 보았다.

불현듯 아침마다 일찍 대문을 열어 놓고 복을 받아들이신다던 할아버지가 그리워지면서 분명 그 맑은 아침 햇살이 바로 복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이 여는 대문소리에 집안이 움직이기 시작하던 가정질서는 까마득한 추억이다. 활짝 열어 놓을 대문이 없는 오늘의 우리 생활에서는 영영 가슴을 열어놓고 살 때가 없을 것인가. 큰 기침소리와 함께 대문 열리던 소리를 마음으로 들으면서 승강기에서 목례하는 이웃들의 얼굴을 생각해 본다. 어쩌면 그들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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