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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니 / 김동명 ​

부흐고비 2020. 3. 31. 09:11

어머니 / 김동명1


타박타박 타박녀야!
​ 너 어디로 울며 가늬?

내 나이 어렸을 제,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혹은 '코쿨' 앞에 마주 앉아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말하면, 달 속의 계수나무와 옥토끼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은하수 가의 견우직녀 이야기, 천태산(天台山) 마구[麻姑] 할멈 이야기, 구미호 이야기, 장사 이야기, 신선 이야기, 그리고 '유충렬전(劉忠烈傳)', '조웅전(趙雄傳)', '장화 홍련전', '심청전' 등 고담책(古談冊) 이야기며, 이 밖에도 이루 들 수 없도록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마는, 그 가운데서도 슬프기로는 타박녀의 이야기가 으뜸이었다.

영영 가 버린 어머니를 찾아,
​ 슬피 울며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

어디선가, 타박녀의 흐느끼는 울음소리 귓가에 들리는 듯하면, 타박타박 걸어가는 타박녀의 뒷모습이 눈앞에 서언하여, 나는 이 슬픈 환상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아아, 타박녀의 울음소리,
​ 타박녀의 뒷모습!

이것은 바로 내 눈물의 옛 고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도 어느 사이에 어머니를 잃은 '타박녀'가 되었구나. 더욱이 나는 어머니와 함께 눈물도 동심도 다 잃어버린, 세상에도 가엾은 고아가 되고 말았구나! 내 나이 어렸을 제, 우리들이 타관에 나와 단칸방 셋방살이로 돌아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떤 날 나는 어머니에게,
​ "어머니는 내가 이다암에 커서 무엇이 되기를 바라나?"(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반말을 썼다.)
​ 그 때나 지금이나 다소의 과대망상증을 가진 나는 자못 자신만만하다는 듯이, 어머니의 소원을 물었다. 순간 어머니의 눈은 빛나셨다. 내 신념에 움직이신 듯…. 그리고 은근하신 어조로,
​ "강릉 군수가 되어 주렴."
​ 이것은 어머니의 향수. 고향으로 돌아가시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비단옷이 아니고는 돌아가시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슬픈 결심이기도 하다. 아아, 어머니는 드디어 고향길을 못 밟으시고 저 세상으로 돌아가신 지 오래니, 내 이제 강릉 군수를 한들 무엇하리.

언젠가, 어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다가 쓸쓸히 웃으시며,
​ "암만해도 너는 좀 못생겼어."
​ 이것은 내 어머니의 무서운 야심이신가. 또한, 그 냉엄하신 비평 정신의 편린이시기도 하리라. 나는 수염을 깎고 새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설 때면, 가끔 어머니의 말씀을 회상하고 고미소(苦微笑)를 흘리는 버릇을 지금도 잊지 않는다.

언젠가, 어머니는 방학 때에 돌아온 나를 보시고,
​ "너도 인젠 편지는 제법이더라. 말이 좀 까탈스러워 흠이지마는――그러나 아직도 병두(炳斗)만은 못해." (병두는 나보다 연장인 내 조카로, 문장에 다소 능하다.)
​ 겨우 국문을 해독하시는 정도의 어머니로, 이 얼마나 '건방지신' 말씀이시뇨? 저 놀라운 긍지와 자부심의 한 끝은 여기에서도 엿보이는 듯….

예수를 믿어 석 달 만이면, 전도(傳道) 부인이 될 수 있으리라던 어머니. 내게도 고질처럼 따라다니는, 대언장담(大言壯談)을 즐기는 버릇이 있으니, 이것도 필경은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슬픈 유산의 하나인가!

  1. 金東鳴: 1900~1968, 호 超虛, 강원 강릉 출생) : 시인. 정치평론가. 시집 ‘파초’, ‘진주만(眞珠灣)’, ‘목격자(目擊者)’ 등이 있으며, 대표시로 교과서에 실린 "파초(芭蕉)"와 가곡의 노랫말로 널리 알려진 "내 마음은" 등을 들 수 있다. 함흥 영생고보 나온 후 여러 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항일운동 연루로 추방을 거듭 당했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靑山學院)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보들레르에게 바치는 시 ‘당신이 내게 문을 열어주시면’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시집 "파초" 등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창시개명을 거부한 민족시인의 면모를 보였다.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정치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1960년에는 초대 참의원에 당선되어 현실정치에 참여하였다. 정치평론집 ‘적과 동지’, ‘역사의 배후에서’ 등을 펴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한 시집 ‘삼팔선’과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고발한 시집 ‘진주만’ 등으로 아세아자유문학상을 받았다. 고향인 강릉시 사천면에 2012년 생가복원과 함께 "김동명문학관" 및 "김동명詩碑공원"이 건립되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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