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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과 포도주, 그리고 돌 / 문형동


나는 옹기를 좋아한다. 그것도 칠팔백 도에 구워진 그릇이 아니라 천삼백 도 이상의 고온에 구워진 옹기를―. 잘 구워진 옹기는 유약이 산화되어 숨을 쉬는 까닭이다.

숨을 쉰다는 건 생명을 지닌 거나 다름없다. 조심스럽게 두들기면 덩그렁 하는 울림이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흔들어놓는다.

가끔은 포도주를 즐긴다. 담은 지 삼 개월이 지나면 숙성된다고 하지만, 적어도 이삼 년 묵은 것이라야 좋다. 잘 익은 포도주에선 고온에 구워낸 옹기의 향기가 나기 때문이다.

포도가 사실대로 써놓은 이야기요, 포도즙이 형상화에만 그친 수필이라면, 포도주는 완숙된 작품에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은 포도즙이나 칠팔백 도에 구워진 옹기와 같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경험이 있기에 더욱 그렇다.

너는 먼저 쓴다는 것이 네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일인지를 살펴보라. 그리고 밤과 밤의 가장 고요한 시간에 네 스스로 물어보라. 그것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수밖에 없는가? 쓰지 않고는 못 견딜, 죽어도 못 견딜 그런 내심의 요구가 있다면, 그때 너는 네 생애를 이 필연성에 의해 건설하라.

문학에 뜻을 두는 사람에게 추상같이 권고했던 릴케의 말이, 방일했던 내 가슴을 서늘케 한다. 비록 시를 배우려는 이에게 충고한 말이지만,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수필가도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적인 정신을 지님으로써 깊이 있는 문학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도 여기에 지지 않는다.

진정한 창조는 이론이 아닌 몸으로 체험한 것이므로, 뼛속까지 내려가 자기 마음의 본질적인 외침을 적어내라.

예술은 감동에 근거할 때 제 빛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폭넓은 독서와 깊은 사색, 체험의 진실, 어느 하나가 부족하면 좋은 글이 되지 못한다. 하나의 제재 앞에 고뇌하고 사색하며 정직한 인생관을 확립한 연후에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자연 사물의 핵심을 꿰뚫은 안목이 생기고, 문장이 간결해지며, 틀이 잘 짜여진다.

특히 자기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함은 물론이다. 그 감정은 깊고 오랜 것일수록 좋다. 독자는 작품에서 진실의 단면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 진솔함을, 경험을 통한 구도자적인 창조성으로 살려낼 때 한 편의 좋은 수필이 완성될 수 있다. 만약 작품이 나쁘면 독자의 평가는 냉혹하니,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벌이 될 것이다.

나는 수묵화를 잘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 수묵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물을 마음에 끌어들이는 데 하루 걸리고, 돌을 마음에 끌어들이는 데 닷새 걸린다는 이론에 끌려서이다. 돌은 철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으면서, 나무 그늘을 반영하고 하늘의 구름을 반영한다. 자기 자신이 작동은 하지 않는 냉정함 속에서도 생명은 살아 있는 것, 그 냉정함, 무표정에서 돌의 훈기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말일 게다.

따라서 돌의 생명을 읽어내려는 기다림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흑구는 「보리」 한 편을 쓰기 위해 삼 년을 기다렸 듯, 좋은 수필가가 되려면 흙 속에서 어찌 싹이 나고 자라는지 그 의미를 새기며 참을성 있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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