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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청량사의 가을 / 김명란

부흐고비 2020. 4. 12. 15:44

청량사의 가을 / 김명란
2019년 제1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대상


수숫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쪽빛이다. 숨 막히는 잿빛 도시를 떠나 붉은 가을 빛 세상을 탁발해볼 욕심으로 청량사로 나선 참이다. 그 곳에 들면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자연의 숨결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고, 걷기만 하여도 보기만 하여도 마음자리 깊숙이 자연의 위무를 받는다.

퇴계의 온기가 스민 청량산! 구름으로 빚었다는 산문을 지나 알록달록한 나무 숲길을 오르자 청량산 청량사의 일주문이 버티고 있다. 일률로 선 기둥이 이색적인 일주문은 무상한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털어내고 '일심'으로 불국정토에 들라는 부처님의 엄숙한 계율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보면서 초입 길을 잡으면 된다.

청량함의 길! 산사 초입부터 오름으로 시작되는 길은 숨이 가쁘다. 낮다고 얕보지 말라는 청량산의 엄포도 들리는 듯 경사진 오름길은 한발 두발 옮길 때 마다 헉헉 소리를 내게 만든다. 길이 워낙 가팔라서 미끄러지기 십상이다. 꾸역꾸역 느린 걸음으로 비경을 쫓는 성급한 마음은 애먼 심장만 쥐락펴락 한다. 오르는 길은 즐거운 고행이며 삶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길가 나무와 나무 사이엔 줄을 엮어 매달아 놓은 연분홍 소원성취 등들이 보인다. 어두컴컴한 초록 숲속에서 올 컬러 인양 돋보여 길을 밝힌다. 등들은 절까지 연결되어 있어 절을 찾아가는 안내 역할도 톡톡히 해 주는 셈이다.

극심한 가뭄에도 굴하지 않고 식물들은 잘 견디어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선사한다. 나무기둥을 빼면 나무 위도 아래도 온통 진초록으로 한 빛 되어 숲을 이루고 있다. 풀과 나무, 꽃과 바람, 산새소리와 속살 되는 나무의 숨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청정함으로 찌든 마음이 치환된다. 비탈진 곳 가을 햇살을 머금은 팥배나무의 선홍빛 열매가 두 눈이 시리게 와 닿는다. 간간이 불어오는 숲 바람소리도 들린다. 계곡 가 양지를 좋아하는 수리취 꽃도 자주색으로 다보다복 피어 귀하다. 온통 자연 그대로여서 친근하고 정겹다. 즐거운 심미안이다.

산길 저만치 돌탑 여러 개가 보인다. 저 탑들은 언제부터 쌓아왔으며 무얼 생각하며 쌓았을까? 돌은 영구불변의 신앙일까. 저마다의 소원을 빌면서 하나하나씩 얹어 놓으며 저렇게 높이 올라갔을 것이다. 돌을 놓는 사람도 각기 다르고 염원하는 소원도 각기 다를 것이다. 그런데 탑의 형태는 모두 비슷하다. 나도 작은 돌 하나에 소원을 담아 이미 쌓아 놓은 꼭대기 부분에 한 층을 더 만든다. 무상한 세월의 흔적인양 돌탑을 에워싼 무성한 쑥부쟁이가 탑돌이를 한다. 내 마음도 함께 돌면서 푸른 이끼를 두른다.

저 멀리 이정표 시목과 함께 산사가 보이기 시작한다. 산사 가까이 길 한쪽에는 기왓장을 엎어서 만든 수로위로 맑은 물이 졸졸 소리를 내며 흘러간다. 수로의 소박함이 정겹다. 수로 반대편 쪽 길엔 작은 돌들로 축대를 쌓은 듯 가지런한 모양이 옥수수 알처럼 빼곡히 박혀 있는 듯하다. 커다란 암벽의 단애도 세월의 흐름을 말하고, 담쟁이 넝쿨이 암벽 위를 붉은 단풍 옷으로 갈아입히고 있다. 암벽 밑으로는 붉게 핀 금잔화가 뿌연 회색빛 암벽과는 보색으로 대비되어 선명하다. 순박하게 피어 등산객들의 얼굴에 미소를 뿜게 한다.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들이 내 마음속에도 가득 찬다.

그렇게 걷기를 이십 여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무렵 천년의 고찰 청량사가 처마를 활짝 펴고 나를 맞는다. 차던 숨을 고르며 입구 쪽에 있는 청량수 우물로 목을 축인다. 청량사는 663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 사찰은 가풀막에 자리한 것이 독특하다. 축대로 쌓은 좁은 공간에 건물들의 앉음앉음이 마치 수수께끼 같다. 축대를 쌓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공간이다. 시간의 두께가 켜켜이 쌓여있는 청량사는 기암괴석으로 올올하게 솟은 12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 산세가 연꽃이라면 수술 자리에 절이 앉아 있는 셈이다. 지형을 둘러보며 내 삶을 둘러싼 봉우리에는 어떤 사연들이 남을까 생각해 본다.

절 가운데 자리한 유리보전은 제47호로 지정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이다. 저 안에는 공민왕의 친필로 쓴 현판과 종이를 녹여서 만든 약사여래불이 있다. 지금은 종이 위로 금박을 해 낫다고 전한다. 종이로 만든 지불상은 우리나라에서는 이곳 청량사에만 있는 불상으로 존재한다. 온통 경내에서 쏟아지는 묵직한 내음이 고궁에서 느껴지는 것과 흡사하다. 나는 온몸으로 스미는 지불 상 앞에 소원 지 한 장을 붙여본다.

유리보전 좌측과 우측에는 범종각과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500년 된 보호수 삼각우송이 보기 좋은 자태로써 석탑 앞에 떡 하니 자리하고 있다. 절 옆으로는 하늘다리로 올라가는 길이 곁하고 있고, 마당가 가장자리에는 맷돌위에 기왓장을 올려 다채로운 모양의 다육이가 가을햇살의 감촉에 윤기가 흐른다. 여러 개의 무쇠 가마솥에는 새색시 얼굴 빛 닮은 연분홍 수련이 쏘옥 올라 와 무딘 솥과는 대조를 이루어 외려 아름답기 그지없다. 부지런하신 스님의 손길이 엿보인다.

아래를 흘깃 내려다보니 우뚝 솟은 석탑이 보인다. 벼랑끝 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매우 인상적이고 특이한 경관이다. 석탑 아래로는 어마 어마한 절벽이다. 절벽 건너 보이는 절경은 청량산성이다.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이곳으로 몽진 왔다고 전한다.

높푸른 가을하늘은 산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석다(石多)산의 절경에 환호성과 감탄사가 연발로 쏟아져 부지런히 산에 오른 보상이 짜릿하다. 봉우리 마다 소나무와 활엽수가 푸름과 갈 빛으로 뒤섞여 돈독한 모습으로 울창하다. 웅장한 산세에서 내려다보는 넉넉한 산줄기가 곧 단풍세상으로 채색되어 수채화 같은 풍경이 뿜어져 나오리라.

가을 풍경을 쏟아 내는 천년의 가람을 둘러보며 사찰이 지닌 깊은 시간의 무게를 헤아려 본다. 찰나의 세월을 두고 각축하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참으로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심연에 잠겨 있던 쓰디쓴 생각들을 털어 놓는다.

아쉽게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내 속내를 알기라도 하는 듯 도토리를 찾아 절 마당을 누비던 다람쥐 한 마리가 쪼르르 따라 나선다. 아직 겨울준비가 덜된 모양이다. 검은콩이 박힌 눈, 귀여운 얼굴, 익살스러운 재롱을 카메라에 담고는 발걸음을 재촉 한다. 오랜 불교의 숨결 위로 짧은 가을 햇살이 기운다. 석양을 품은 청량산의 단풍자락이 유난히 붉다. 나는 그곳에다 설익은 나를 내려놓고 구붓한 일주문을 빠져 나온다. 오늘 청량산 가을 산사에서 물든 노란 성관이 견고해지기를 염원해 본다.

 

 


       ◆ 당선소감 - 김명란 씨 "청량사 풍경 웅크린 감정 순환 시켜… 눈·귀 열어 좋은 글 쓸 것"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수상 소식을 들었다. 기쁨을 이루 말할 수가 없어 가슴이 벅차오른다. 직원들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치며 축하의 메시지를 전한다.

경북 봉화 청량사는 청량산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봉화는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매년 한번정도는 청량사에 들러 청정한 바람소리를 들으며 웅크리고 있던 감정을 순환시킨다. 한 발 두발 산사를 오르다 보면 온 마음이 산사 절경에 흠뻑 빠져 든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뚫어보며 글을 써내려 가면 생각과 느낌이 자유롭고 신선하다. 그래서 '청량사의 가을'을 노래하고 싶었다.

늘 시간에 쫓기 듯 사는 나에게 이처럼 큰 선물을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당선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것이 꿈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수필의 세계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흐름을 주었고, 때가 낀 뇌를 말끔히 청소해 주는 약산수 같다. 가슴속에 묻어 둔 감정의 파동을 체험을 통해 다각적으로 글을 쓰는 게 쉽지는 않지만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글밭을 만들어 주신 경북신문사에 감사드린다.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 당선의 영예를 안겨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 심사평 - "수준 높은 기교로 삶의 이야기 담담히 이끌어내"


'제1회 경북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은 기대 이상의 호응이 있었습니다. 우선 관심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예선을 통과한 작품은 90여 편으로 각기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번 공모전은 소설 작품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장을 보고 듣고 오감을 통해 받아들이며, 받아들인 아름다움을 삶의 철학으로 쏟아주었으면 하는 취지였습니다.

공대원 님은 교육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받았으며, 문장을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장미자 님은 감성적인 문장이 좋았으나, 사물을 나열하지 말고 삶의 철학을 조금 더 심도 있게 담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정화 님은 선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찾는 곳의 의미를 부여하는 구도는 좋았으나, 사물을 접하는 데 머물고 말았습니다. 전대진 님은 현장감과 아름다웠던 과거를 적절하게 섞어 표현하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김인현님과 장명희 님은 탄탄한 문장력은 가지고 있었으나, 역사적인 부분을 좀 더 성찰하였으면 하는 미련이 남았습니다. 고영관 님은 구도는 좋았으나, 문장이 진부하다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습니다. 이명근 님은 들머리 부분이 흠으로 남았습니다. 김재순 윤순옥 김명란 님은 심사 위원들에게 신선을 충격과 기쁨을 함께 주는 수작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김명란 님의 '청량사 가을'을 선정하는 데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산(山)을 이야기하며 선인들의 온기를 담아내는 수준 높은 기교와 가뭄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이끌어 내는 능력은 선(選)하기에 주저함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심사위원 양왕용·김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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