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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혼자서 부르는 합창 / 김미정

부흐고비 2020. 4. 11. 21:59

혼자서 부르는 합창 / 김미정


​ 나는 간혹 그녀를 일컬을 때면 '치맛단을 꿰매준 여자' 라고 말해왔다. 십팔 년 전 봄날이었다. J시 시외버스에서 내릴 때 나는 몹시 당황하였다. 까만 벨벳 플레어드 스커트 단이 후루루 뜯겨 있었던 것이다. 몇 군데 가게를 거쳤지만 실바늘을 살수조차 없었는데 한 가게에서 그녀가 직접 친절하게 꿰매어 준 것이다. 고맙다는 인사말을 하고 돌아가는데 자꾸만 뒤통수가 뜨거웠다.

돌아보니 그녀가 한길까지 나와서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나는 눈길에 이끌리듯 되돌아가 내가 사는 곳을 알려주었고 그녀도 꼭 다시 들려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어쩐지 부끄러웠고 길눈마저 어두워서 거기가 어딘지 무슨 가게였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나를 보고 섰던 그 모습만이 마음에 담겨있었다.

그 이듬해던가, 어느 날 한 여자가 우리 집에 왔을 때 말하기를 J시에 나와 어울릴만한 참 좋은 여자가 있다고 하였다. 나는 섬광처럼 그녀가 떠올라 혹시 치마를 기워준 일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하였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그 점포가 무슨 점포라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잠시 목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재회한 것은 너무도 우연한 자리에서였다. 바람찬 겨울 새벽, 나는 역 앞에서 방학을 맞은 여고생 딸애랑 어느 스님이 추진한, 강원도 '소쩍새 마을' 행 버스에 올라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버스에 오른 내 또래 한 여자가 그 많은 빈자리를 두고 하필 내 곁에 와 앉았다. 우리는 서로 까맣게 몰랐다. 그녀는 많은 얘기를 쏟았고 나는 주로 들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서로 눈길이 깊이 마주쳤을 때 그녀가 먼저 아, 하고 놀라는 거였다. 팔년만의 만남이었다.

그 후 십 년 간, 우리인연은 그리 수선스럽지 않았다. 그저 안개 자욱한 강 위에 다리가 서 있듯 이곳과 저곳에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는 다리, 그 모양새로 그 아래 세월은 흘렀다.

그동안 거주지도 환경도 바뀌었다는 그녀, 시부모와 한데 살며 직장에도 나가는 그녀는 어떤 날, 소녀처럼 들꽃을 한 아름 꺾어 안고 찾아왔고 영적 세계에 심취, 그 공부를 위해 인도까지 다녀와서는 내가 잘 모르는 그 세계의 귀한 이국 책을 주고 갔으며 내가 작품낭송을 하는 날, 그리고 봉사단 회장 취임식을 하던 날 등엔 없는 듯이 조용히 행사장에 왔다가 가곤 했는데 한결같이 화장기라곤 없는 꾸밈없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육 개월 전쯤인 지난 늦겨울, 그녀가 나에게 책 한 권을 주려고 맨발인 채로 급히 시외버스를 타고 와 나의 집을 찾아온 이후, 전화로 그의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그녀의 딸은 '먼 곳에 갔고 한참 있어야 돌아온다'고 몇 번째나 똑같은 대답이었다.

자신을 가만히 버려두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던 그녀, 정신적으로 무언가를 갈급해 했던 그녀가 마침내 그 무언가를 이루려 결단하고 나선 모양이라고 짐작하였지만 그런 무모한 대답이 포개이자 나는 불현듯 그녀가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바로 이틀 전이었다. 나는 내가 어디에 사는 친구라는 사실을 전화상 처음으로 선명히 밝히고 그녀의 행방을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 딸이지만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자신들도 몰라서 찾고 있었다고.

이런 차에 초여름 휴일 아침 그녀가 전화를 해온 것이다. 응당 딸과 만났거나 통화하고 나를 찾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배가 고파서라는 거다. 동전을 넣는 공중전화는 자꾸 끊기었다. "그래 알았어. 거기가 어디지? 내가 그리로 갈게. 아냐 시간을 줄이도록 하자" 그리하여 차를 타면 그녀로선 이십분, 나로선 한 시간여 거리인 J시로 약속을 잡고 나는 남편에게 운전을 부탁했다.

한 번도 아쉬운 소리 한적 없는 그녀였다. 나는 필요한 여름정장을 사려던 돈을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집을 나서기 전에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확인하고 싶은 점이 있었다.

그 딸이 받았다. 만약, 집으로 돌아올 것을 권한다면 어머니가 돌아오실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딸은 대답이 없었다. 안 오실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바꾸어 물어보자 "네" 라는 대답이 분명했다. 그녀의 의지가 그만큼 완고하고 일상에로의 회귀가 그녀에겐 무의미함이 틀림없음을 확인한 거였다.

강을 낀 J시, 작은 박물관 앞에서 그녀와 만났다 그녀를 본 순간 나는 먹구름이 걷히듯 안도하며 기뻤다. 내가 그녀를 안 뒤로 이처럼 밝고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배고픈 얼굴이 아니구먼" 그도 나도 거리낌 없이 웃으며 포옹했고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여유스레 먼저 박물관을 일별하고는 근처의 공원 입장권을 끊어 시원한 정자로 올랐다.

그녀는 솔직했다. 전화로도 언급하였기에 나는 그녀가 새 반려자를 만났다는 사실에도 놀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와 같이 영적인 길을 추구하는 어느 여성일 거라고 짐작했다가 남성도반이라는 사실이 좀 의외였지만 그것은 공부자 그녀에겐 별 대수롭잖은 일로 여겨졌다.

그녀가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젊은이들 같은 육욕에 의한 동반이 아닐 거라는 건 그간의 그의 영혼의 갈급한 추구의 몸짓만으로 능히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얼마 전 남편을 만나 혼기의 자식들을 결혼시킬 때까지만 이혼을 보류하기로 합의 보았다는 사실도 들려주었다 그러면서 가족을 얘기할 때는 눈물을 참지 않았다.

보호막인 알 껍질도 그 어떤 책임도 과감히 깨버리고 추구하는 그녀의 길, 그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녀만의 뜨거운 운명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세상의 보편적 잣대로 그녀를 잴 생각일랑은 추호도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추구하는 길이 제각각 다르고 삶의 방식 또한 다르다. 시행착오, 그 궤도수정으로 잠시 질서가 흔들릴 때도 있지만, 세상만물은 제 각각 고유의 음색과 빛깔로 하모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가 나름대로 열심히 '혼자서 부르는 합창'을 하며 더불어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녀를 만나고 보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목돈을 만들어야 할 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스스로를 수련하는 길로 막노동도 했다는 용기와 자력의 그녀가 뱃속 허기를 메우련다고 기댈리는 만무였다. 나는 그 목돈에 훨씬 못 미치는 봉투를 미안하다고 말하여 주었고 그녀는 두 손 모아 감사의 합장을 하고서도 나를 한동안 포옹하였다.

언젠가 그의 남편도 나도, 쉬어갈 곳을 마련할 테니 다녀가라고 말하였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또 영원히 못 만날지도 바람같은 우리 인연에 나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헤어질 즈음 나는 군더더기 같지만 그 딸에겐 전화를 한번 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에 나도 가슴이 아리었다.

그녀를 만나는 동안 나는 왠지 느껴졌다. 이즈음 내 마음의 어둠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허접 쓰레기 같으면 한 가닥 연기인가를. 인간은 아니 생명체들은 존재함, 그 자체로 충분히 아름다운 우주적 존재라고 생각되는 거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마음 기운이 새로워지는 거였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이야' 나는 알 듯 모를 듯한 그녀의 말을 씹으며 돌아오면서 우리의 인연을 새삼 돌아보았다. 사람사이란 수없이 만나고도 정작 서로를 왕래하지 못하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단 두어 번 만나고도 서로를 꿰뚫듯 영원히 가슴에 각인되는 특별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만나기로는 열 손가락을 채웠을까….

나는 그녀가 어디에 있든 어떻게 살든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머리 아닌 가슴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제 안의 부르짖음을 쫓아 화폭처럼 접어버린 그녀의 어제와 새 오늘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껍질이 많은 우리 인생에서 아프게 껍질을 부수며 '참 자기'에게로 나아가는 그 길에 우주의 무한한 광명이 비추기를 기도한다.

언젠가 머언 그녀에게서 내 영혼의 거미줄을 거두어 내는 한 가닥 솔바람이 불어올 듯도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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