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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돼지의 대덕 / 설의식

부흐고비 2020. 5. 10. 22:56

돼지의 대덕 / 설의식1


금년은 세차 간지로 정해니 풀어서 '돼지해'다. 부르기가 거북한 이름이다. 더럽고, 못나고,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일체의 악명을 온통 돼지에게 돌리어 '돼지 같은 놈, 돼지 같은 놈' 하고 거세가 일치하야 나무라는 관계상, 어학만으로는 불쾌한 이름으로 정론이 되어 있다.

그렇게 불쾌하거든 애초에 쓰지 말 일이다. 쓴다고 할진대, 자 갑자, 을축으로부터 임술, 계해에 이르는 육갑의 노선은 수미일관이니 하는 수 없다.

요즈음 세태처럼 방편대로 뜯어 고치는 '뒤범벅'일 수는 없다. 성립이 급하다고 기정된 수의 법문을 즉석에서 고치는 '입법의원'처럼, 그렇게 간단하게 '정인'의 호랑이로 고칠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다.

작년은 병술이니 '개'요, 재작년은 을유니 '닭'이다. 닭이라 하면 새벽을 연상하야 서광을 의미하고, 각성을 우의하야 태동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을유의 재작년에 해방의 서광을 보았고 대업의 태동을 보았다.

새 날이 밝는다고 닭은 울었지만 아직도 새벽이었던지라. 강산을 얼빤--한 어둠 속에서 갈피를 못 찾았고 민중은 늦잠이 풀리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였다.'닭'으로 표현하기에 거의 알맞는 정도의 동태였음은 묘한 일이었다.

'개'는 영역감에 민첩한 동물이요 영지욕에 탐람한 동물이다. 그러므로 자령을 편수하기에 사력을 다하여 덮어놓고 배타를 일삼아 짖기를 잘 한다. 침경은 고사하고 접경도 못 할 정도로 날뛰고 싸움을 잘 한다. 냄새도 잘 맡지만 꼬리도 잘 흔든다. 한 술 밥에도 꼬리를 흔들고 한 덩이 고기에도 아양을 부린다…. 이렇게 쓰다가 보니 '개' 이야기가 아니라 작년 1년간 걸어온 우리 자신의 자화상 같아서 붓이 저절로 멈추어진다. 자괴와 자책을 느끼는 까닭이다.

을유가 그렇고, 병술이 그런지라, 정해의 금년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혹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엉터리없는 '해'자에다 연을 달아서 돼지의 대덕을 일컬어 보자.

돼지라고 더러운 것을 자진하여 즐겨할 이치는 천만에 없겠다. 집이거나 자리거나 사람들이 더럽게 하여 주니까 그저 순수할 뿐이겠다. 매사에 까다롭지 않은 태음적 기질이 유달리 드셀 뿐이다. 미추와 편부에 대한 둔감이라 하기보다도 그를 초월한 태연자약이니 말하자면 포용 중에도 대포용이다.

'하해는 불관오독지수'라 하야 하해가 가진 관용의 지덕을 일컫거니와 이 같은 논법으로는 돼지의 그 점이 실상 돼지의 미덕인 것이다. 그런고로, 나무라기보다도 차라리 이 잡을 나위도 없이 광막한 돼지의 대덕을 우리도 본떠서 금년 1년은 태음적으로 나갈 수 없을까? 숙시라 할 것 없이, 숙비라 할 것 없이, 대포용, 대둔감으로 거세정조를 한입에 집어 삼키고 상하좌우를 한 팔에 끼어 품는, 그러되 태연자약하는 그러한 지도자가 과연 없을 것인가? 해년을 위하여 우리는 이것을 대망한다.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는 돼지의 살림을 '악'으로 지목하야 모두들 나무라기만 한다. '제 똥 구린 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지마는 책기엔 불충이요 책인엔 충인 식으로 책돈에는 어찌도 그리 충실한가? 먹기만 하고 놀기만 하여서 그야말로 돼지같이 살진 사람이 인세에는 과연 없는가?

돼지는 놀고 먹을지언정 그래도 최후는 '살신성인'의 대희생을 천성으로 각오한 짐승이다. 사람에게 이 각오가 있는가? 중생의 번영을 위하여 자신의 1명을 버리는 희생, 그를 감수하는 대덕을 가진 자 과연 몇이나 되는가? 글 아는 돼지가 있어서 만일 이 수록을 읽는다면 독파 지차에 빙그레 웃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방성하야 대곡할 것이다.

돼지를 못났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체국을 가라킴이리라. 특히 없는 듯한 짧은 목과 명목만의 그 꼬리를 가리킴이리라. 미상불 '볼품'으로는 낙제다. 거듭 말하거니와 오직 '볼품이 없을 뿐'이다. 이 볼품 때문에 못났다고 하는 것은 볼품만으로 발라 맞추려는 덜 익은 사람들의 덜 익은 말이다.

볼품 있는 꼬리로서는 금류에 공작이 있고 수족에 여우가 있다. 필자는 공작의 꼬리를 미워한다. 그 오만불손한 꼬리! 유한마담의 부화와 같은 그 잡색의 어지러운 꼬리, 시대가 시대인 만큼 형식의 장식에 흐르는 값싼 무지개적 환몽의 상징 같은 그 꼬리를 필자는 즐기지 않는다. 더구나 간사하고 요망한 여우적 꼬리, 하늘거리고 날름거리고, 이리로 알랑, 저리로 달랑거리는 그 환술적 꼬리는 애초에 불취다.

돼지에게 있어서는 볼품 있는 꼬리가 본질적으로 필요치 않았다. 볼품보다는 '속품'으로 살아가는 돼지의 처세관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청빈에 자안하고 누옥에 자적하는 그 심법상으로도 아도에 필요한 흔드는 꼬리의 소유가 필요치 않았다. 배추동물로서의 지체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하여 꼬리의 명목만 세우면 그만이다. 이로써 못났다 할진대, 차라리 명분 있는 속품의 못난이가 될지언정 신기루 같은 볼품의 잘난 이는 안 되겠다! 하는 것이 돼지의 소신이요 또 본회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돼지의 이같은 심경에 공명하는 자 그 얼마나 될 것인고!

돼지는 목이 짧다. 사뭇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짧다. 없기론 생선이 1위여 포유족엔 아마 돼지가 상석일 것이다. 그러나 목이 짧으니까 반드시 못난 것이요, 길어서 잘났다는 논법은 어디에 있는가?

목이 길기론 기린이 수석이다. 그런 실상 길어서 결이다. 그 길다란 목을 늘이어 좌로 우로, 혹은 전후로 상하로,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는 그 줏대 없는 겁쟁이 태도는 보기에 어떠한가? 이리 살피고 저리 살피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는 그 보조는 풍신 좋은 체구와는 전연 딴판이다. 이로써 기린 자신에 욕은 될지언정 자랑될 이치, 천만에 없겠다.

돼지는 다행으로 짧아서 곧은 목이다. 고집은 셀지 모르나 좌고우시의 추태는 있을 수 없다. 목표를 향하여 일직선으로 직진할 뿐이다. 그러기에 '저돌지용'이라 하야 부탕도화의 용과 검산 도수를 초개같이 보는 유진무퇴의 용은 오직 돼지에게 있는 것이다.

정해의 금년은 돼지의 대덕을 본뜨자. 대포용, 대희생, 대용맹으로 신지를 향하여 일로로 직진하자!

  1. 설의식(1900~1954): 평론가, 언론인. 호는 소오. 함남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일보 편집국장, 부사장, 새한 민보 사장 역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설의식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날카로운 비평문 속에는 민족주의적인 사관과 지사풍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의 필치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청신하게 각성시켜 주는 매력이 있다. 사물을 관조하되 근원으로부터 꿰뚫는 눈이 있었으며 거기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그를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빛나게 하였다. 수필집으로 "해방 이전", "화동 시대" 등이 있으며 '유관순 추념문'이 유명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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