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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서서 죽는 것들 / 박양근

부흐고비 2020. 5. 26. 09:51

비는 내리는 게 아니라 태어난다. 태어나는 순간에는 자진(自盡)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직립으로 생을 마치는 비의 강렬하리만치 단순한 생 앞에서는 모든 것이 고개를 숙인다. 대지를 북가죽처럼 두드리는 비의 기세를 바라보면서 나무가 곧다, 깃대가 곧다, 탑이 곧다, 사람도 그러할 수 있다고 되뇌어 본다.

수평이 주는 평온을 마다하고 수직의 고통을 잃지 않으려는 것은 지조일까, 오기일까.

여름의 무더위를 식힐 겸 정자의 고향인 함양을 찾았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함양으로 가는 길은 몇 구비를 돌고 돌았다.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계곡도 뱀처럼 휘돈다. 물길과 찻길이 굽으니 마을 골목도 반달처럼 굽고 주민들의 발걸음도 느릿해 보인다. 백 개가 넘는다는 정자조차 눈발같이 흩뿌리는 계곡수 곁에서 다리를 꼬듯 앉아있다. 칡처럼 사는 게 인생이라고 녹수와 바위가 말하고 있다.

수승대 유원지에 들렸을 때다. 굽은 산등성 너머로 뾰족한 무엇이 보였다. 곡진한 계곡 한복판에 옹고집처럼 서 있다니, 산촌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외톨이 모습이 가상하여 가까이 다가섰다. 숲을 배경으로 반듯하게 선 고사목이었다. 상단 부분에 몇 개의 마른 가지가 돋아 있을 뿐, 나무 둥치는 팔등신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미끈하다.

“서 있는 자.”

청정 유림의 땅을 지키려는 창일까. 선비의 절개를 나타내는 솟대일까. 그게 아니라 세상을 등진 묵객이 자신이 애용하던 붓을 세워둔 것이 대지의 기를 받아 자란 것인가. 형상만으로 보면 하늘에서 단숨에 내려 뻗친 한 획 글자다. 주목은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고 한다. 그 고사목도 땅에 쓰러지면 썩기 시작한다. 벌레들이 덤벼들고 이끼들이 달라붙는다. 무엇이든 누우면 잡념이 생기고 기운을 잃어가기 마련이다.

“입신立身.”

청운의 입신을 두고 구양수(歐陽脩)는 힘써 배우는 것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강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백여 년, 마른 뿌리로 홀로 버텨 온 백여 년, 고목(孤木)은 스스로 입신의 뜻을 실천하는 듯 보인다.

서 있는 게 참으로 힘들다. 오죽하면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다고 말할까. 전쟁에서 포로를 잡으면 굴신(屈身)의 모욕감을 주고 종교에서도 오체투지를 가장 심한 속죄의 벌로 간주한다. 만물의 영장인 사람조차 눕는 유혹을 이겨내기 힘든 법인데 나무는 와신(臥身)한들 부끄럽지 않을 것이건만 죽어도 청절(淸節)을 잊지 않는다. 허만하 시인은 그 지조를 ‘비는 서서 죽는다’로 노래했다. 서서 태어나고, 서서 살고, 서서 죽는 것이 시인에 의해 태어난 비뿐만이 아니다.

언젠가 뉴욕항을 찾은 적이 있다. 때마침 범선 축제가 베풀어져 허드슨 강변에는 많은 범선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돛대들이 도열한 선창은 가로수가 울창한 거리처럼 보였다. 부둣가 식당에는 만국기가 걸리고 손님들은 밤을 새웠다.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하던 범선에는 구경꾼들이 오르내렸다. 흥청거리는 부두의 분위기와 달리 돛대는 곧게 몸을 세우고 있었다. 오만하리만큼 당당하고 초연하여 고독하게 보였다.

파도가 밀려오면 배는 출렁거렸다. 흔들리는 뱃전에 기댄 내 몸도 함께 일렁거렸다. 어디엔가 기댄다는 게 이렇게 편한 줄을 몰랐다. 나무를 보면 저것처럼 살리라 다짐했는데 배에 몸을 맡기고 기분 좋게 흔들리다 보면 굽고 휘는 삶도 괜찮다 싶다. 조변석개(朝變夕改)만큼 사람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이 없다.

수승대 계곡의 고사목을 한동안 지켜본다. 더 가까이 다가선다. 하얀 몸매에는 계곡 바람이 부딪힌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꿈쩍하지 않으려는 세월의 상처일 것이다. 사목(死木)일지라도 뿌리를 온전히 박아둔 덕분에 지금도 자세를 지켜낸다.

고사목이 문득 가로등으로 보인다. 물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고 시간마저 달아나는 계곡을 오롯이 지켜내는 가로등. 고사목 꼭지에 보름달이 걸리면 수승대를 시로 읊은 퇴계 이황 선생은 분명 외등의 절개를 다시 노래할 것이다. 그러면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있는 고사목은 다음 해에도 세찬 물살도 버텨낼 것이다. 차가운 눈보라도 고스란히 받으며 환하게 웃어 줄 것이다.

요즘 입상(立像)에 어떤 물상이 있는가를 종종 생각한다. 빗줄기를 닮은 것들, 빨래를 매단 바지랑대, 눈 덮인 들판에 홀로 선 전봇대, 붉은 사막을 걷는 낙타, 푸른 논에 외다리로 멈춘 백조…. 그들은 계곡의 고사목처럼 평생 청풍명월을 즐기거나, 돛대처럼 굽이치는 파도를 이겨내지는 않지만 살아있는 견인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더더욱 직립으로 명을 다하는 비를 지켜보며 나는 고개를 숙인다.

몸만 서 있음으로 제 가치를 과시하려는 것들이 비의 자존심을 모독하고 있다. 서서 태어나고, 서서 자라고, 서서 죽는, 진정한 종족들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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