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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밤과 낮의 경계에서 / 장미숙

부흐고비 2020. 5. 28. 10:09

그가 쓰러졌다. 육중한 몸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질 못했다. 방과 식탁 사이에 누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지도 돌아눕지도 못한 채 눈만 껌벅였다. 한쪽 팔과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를 본 순간, 여자의 머릿속에는 어떤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며칠 전의 꿈 내용이었다.

기분 좋은 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 꿈도 아니었다. 잠에서 깬 뒤, 꿈은 곧 잊혔다. 다만 뭔지 모를 복잡한 일들이 한꺼번에 터졌던 기억만 남아 있었다. 어딘가로 한없이 쫓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주위 사물들이 형체 없이 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쓰러져 있는 그를 보자마자 왜 꿈이 떠올랐는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예감을 상징하듯 의식은 자꾸만 한쪽으로 흘러갔다.

입던 옷 그대로 그는 구급차에 실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팔다리가 온전한 채 들어온 집이었다. 스스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세수하고 양치를 한 곳이었다. 화장실엘 가고, 화초에 물을 주면서 휴식을 취하던 공간이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보고 싶은 걸 보고, 자유로운 생각처럼 육신도 자유로웠다. 하지만, 하루 사이에 그의 몸은 모든 자유를 박탈당했다. 타인의 힘에 의지해 그는 집을 벗어났다. 자신의 체온과 일상이 공존했던 곳을 뒤돌아볼 틈도 없이 그의 육신은 집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종합병원 응급실은 황폐했다. 인간이 누려야 할 안락과 행복, 즐거움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밖에서만 서성거렸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다. 단말마의 비명과 신음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말해주었다. 고통과 좌절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곳은 사람들 얼굴마저 잿빛이었다.

쉴 새 없이 호송되어 온 환자들의 모습도 가지각색이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남자, 이마에 피를 흘리는 아이, 의식을 잃은 노인, 고통스러워하는 소녀가 차례로 들어왔다. 몸부림치는 소녀를 어른 여섯 사람이 내리눌렀다. 소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들은 주사약을 투여하고 팔다리를 침상에 묶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녀를 여자는 바라보았다.

상처를 꿰매는지 아이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울음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아이는 자신의 온 힘을 다해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얼굴에도 울음이 가득했다. 아빠인 사람은 안절부절못하고 병실을 서성거렸다. 응급실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기다림에 익숙해져야 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결과를, 차례를, 처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의자에 앉았다. 그가 영상실로 실려 간 지 두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기다리는 거 외에 여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쯤 그의 몸을 기계가 훑고 있을 것이었다. 그의 팔다리를 마비시킨 원인을 찾기 위해 기계는 그의 몸에 방사선을 쏠 것이다. 사람의 몸속을 기계가 들여다보는 동안 그는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도 모른 채 의식의 줄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여섯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는 병실로 옮겨졌고 여자는 의사로부터 그의 병을 전해 들었다. 여자가 짐작한 대로였다. 여자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 병실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무색하게 병원은 약간 춥기까지 했다.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여자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며칠 전 꿈에서 본 광경처럼 모든 것이 얽혀버렸다.

육체의 처참한 무너짐은 의지로 다스리지 못한 몸의 반란이었다. 불을 보고 뛰어드는 나방처럼 현재의 기분만을 위해 미래를 망각해버린 결과였다.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대가가 온전히 그의 것이 아님에 여자는 좌절했다. 다른 사람이 일으킨 파도에 순식간에 휘말려버린 걸 알았다.

이십여 년 가까이 여자를 옭아매고 있던 불안이 사라졌다. 하지만 여자는 바윗덩이가 어깨를 짓누르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긴 세월 떨쳐내 버리지 못한 불안이 꼬리를 감춘 자리에 바윗덩이가 들어앉았다. 여자는 차갑게 웃었다. 이게 삶이란 말인가. 불안에 저당 잡혀버린 세월을 찾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바윗덩이에 깔린 것 같았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허탈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또 다른 견딤의 시간 앞에 여자는 몸서리를 쳤다.

움직임이 없는 팔이 그와 분리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의식하지 못했다. 그의 삶을 파멸로 이끈 술잔을 집어 들던 팔이었다. 여자에게 삿대질하던 팔이었다. 여자를 불안이란 올가미 속에 가둬버린 팔이었다. 여자의 삶을 쥐락펴락하던 팔이 죽은 듯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 그의 팔을 여자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한 듯 보였다. 곧 툭툭 털고 일어나 집에 갈 것처럼 얼굴은 아직 평온했다. 그 평온한 얼굴이 자신의 의지인지, 약물 때문인지, 뇌 조직의 괴사로 인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육체가 영혼과 분리되어버린 듯 혼란스러울 터였다. 몸과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그에겐 부족했다. 하지만 앞으로 그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많은 시간이 현실을 인식해줄 터였다.

후회와 자책이 그의 몸을 꽁꽁 묶어버릴 것이고, 비참함과 외로움이 그의 세포를 갉아 먹을 것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조차, 혹은 죽음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함이 심장을 강타할 것이다. 술에 삶을 저당 잡히지 않았더라면, 가족의 소중함을 일찍 알았더라면, 무엇보다도 몸을 아꼈더라면 하는 후회는 눈물이 되어 쏟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깨어있는 시간의 괴로움은 이제 그의 것이 되었다.

그가 쓰러지기 전, 불안과 두려움은 늘 여자의 것이었다. 그의 비틀거리는 몸짓, 그의 흐트러진 목소리, 그보다 먼저 문을 열고 들어오던 술 냄새에 여자의 심장은 비틀리고 말라갔다. 여자가 바란 건 오로지 마음의 평화, 평온한 일상이었다. 이제 평온한 일상이 평온하지 않은 거대한 짐을 싣고 여자 앞에 멈춰 섰다. 여자는 밤과 낮의 경계에서 길을 잃어버렸음을 알았다. 여자의 등 뒤로 서늘한 어둠이 촉수를 뻗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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