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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재 / 변종호

부흐고비 2020. 7. 2. 22:47

피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겹겹이 쌓인 산허리 중에 그나마 쉬운 곳에 길을 냈으나 편히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굽이 돌고 돌아 가쁜 숨 몰아쉬며 가풀막을 힘겹게 올라야 넘을 수 있다.

재를 처음 넘어 본 것은 초등학교 2학년 초, 설구산에 온통 붉은 꽃물이 들었던 시기였다. 어머니 손을 잡고 타박타박 걸었다. 노산의 늦둥이로 태어나 체구는 작고 병약해 두 번의 강을 건너고 재를 넘는 십리 장터를 다녀오는 것은 무리였다. 소풍을 앞두고 옷이랑 신발을 사준다는 달곰한 유혹이 없었다면 재를 오르다 벌렁 드러누웠을 일이다.

기억 속의 주치재는 높기만 했다. 그런데도 이 재를 넘어야 영월이나 제천, 원주를 갈 수 있었고 주천 중학교는 물론 장터에 가느라 곡식을 이고 진 사람도, 우시장으로 끌려가는 소도 큰 망울에 눈물을 흘리며 재를 넘어야 했다.

집에서 반마장거리에 있던 주치재는 슬픔의 고갯마루였다. 능선에 재를 내준 설구산에는 전쟁의 상흔으로 녹슨 총열과 누군가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을 유골이 나물 뜯는 어머니를 따라간 내 눈에 띄기도 했었다. 가족을 두고 전답에 집까지 팔은 내 아버지가 별빛으로 길을 가늠하고 넘었고, 원망스러운 가장이 팔아넘긴 집을 이 악물고 되찾은 어머니가 큰 자식의 빚 청산으로 넘기고 옷 보따리 하나 달랑 이고 눈물을 밟으며 넘은 서러운 고개였다.

경사진 재를 오르느라 숨소리가 거칠어질 무렵 왼쪽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들기름에 볶은 소금을 안주로 두어 번의 막걸리 주전자를 비웠을 불혹의 상진이 아버지가 트럭 적재함에서 떨어져 이승을 하직한 곳이라 동네 사람들은 지나칠 때마다 불귀의 그를 떠올려야만 했다.

오르내릴 때 많은 사람을 힘들게 했던 주치재는 장터나 학교 갈 때는 희망으로 넘었고 해거름 귀갓길의 재는 반겨줄 가족이 있었기에 수월하게 넘었던 것 같다.

그 높고 힘들었던 재를 세월이 분칠한 금이 얼굴에 그어지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숨길 수 없는 나이에 차로 재를 올라보니 아주 조그만 언덕에 지나지 않았다.

이만큼 살아보니 눈에 보이는 물상의 재는 다소 시간이 걸리고 고통스럽긴 하지만 견뎌내면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닷물 속에 꼭꼭 숨었다 썰물 때 불쑥 내미는 여 같은 재가 곤혹스러웠고, 더 넘기 어려운 것은 무엇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재가 가혹하리만큼 괴롭혔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안개 속 같아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하는지, 몇 굽이를 더 돌고 돌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답답한 가슴을 치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 고단해 그만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넘어야 할 재는 사람에게도 분명히 있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돈과 힘을 가진 곳에 몰리게 되며 일부는 그것에 얹혀 도움을 받거나 잇속을 챙기려 들기도 한다. 그런 속내가 있기에 오랫동안 함께해 잘 안다며 달려들었다 된통 곤욕을 치르기도 했었다. 그런 경험을 통해 비친 나를 돌아본다. 나 역시 잘 가고 있는 누군가의 걸림돌이 되거나 행짜를 부려 힘들게 만든 재로 기억되지는 않았는지.

걸어서 넘었던 현상의 재는 문명의 이기로 쉽게 넘을 수 있지만, 인생길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발을 걸거나 그 자리에 기어코 주저앉히려 드는 운명 같은 재를 넘는 것은 도를 닦는 듯한 수련이었다. 가는 길 막아섰던 재로 더러는 돌아가기도 했고 쉬어가느라 더디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깊어졌고 성찰을 통한 내적 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이순 중반에 돌아보니 겪었던 모든 재가 마냥 힘겹게만 한 건 아니었다. 피가 뜨거워 세상이 뭔지도 모르고 날뛸 시기에는 속도를 줄이고 진중하라는 의미와 잠시 멈추고 성찰하라는 속 깊은 메시지였다. 수없이 넘어온 재를 넘는 힘듦으로 평지의 고마움과 진정한 편안함을 맛보게 되었고 넘느라 극에 달하는 고통이 길고 클수록 맑은 영혼을 건질 수 있다는 이치도 터득하게 되었다.

아직 넘어야 할 높고 험준한 재가 남아있을 것 같다. 쉽게 넘었던 재도 없었고 높다고 넘지 못한 재도 없었으니 서두를 이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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