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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풀꽃 이름 / 정목일

부흐고비 2020. 7. 8. 23:22

애기똥풀, 며느리밥풀꽃, 홀아비꽃대. 우리나라 풀꽃들을 보면 황토 내음과 바람의 숨결과 이슬의 감촉이 느껴진다. 너무나 순진하고 착해 보여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풀꽃들이 낯설지 않은 것은 언젠가 한 번 대지의 품속으로 돌아가게 되면, 무덤가에서 웃어줄 꽃이기 때문일까.

풀더미 속에서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고, 이름 한 번 불려지지 않을 듯한 부끄럼 잔뜩 머금은 풀꽃들을 보면, 가만히 다가가 귀엣말을 나누고 싶다. 풀꽃의 표정은 시골 아낙네처럼 수수하다. 치장을 하지 않아 눈을 끌지 않으나 순박하고 단아하다. 우리 산등성이의 고요하고 은근하게 이어지는 임의 눈썹 같은 곡선, 어둠을 걷어내는 여명이 창호지문을 물들일 때의 눈부시지 않으나, 마음이 환해지는 그 삼삼하게 맑은 빛깔을 품고 있다. 애써서 가꾸고 기른 꽃이 아니라, 우리 땅의 자연과 기후와 땅기운을 받아, 소박하지만 소담스런 일생을 피워놓았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이 발견하고 깨달은 삶의 이치와 의미를 담아내 놓았다. 풀꽃은 장식적이거나 화려한 인상과는 달리 소탈하고 아리잠직하다.

우리 풀꽃들의 이름들에선 맑고 천진한 눈매가 있다. 은근한 그리움의 향내가 있다. 개불알풀, 큰개불알풀, 노루오줌, 쥐오줌풀, 넓은잎쥐오줌풀……, 어떻게 불알, 오줌, 똥을 꽃 이름으로 달아놓았을까. 조금도 더럽거나 역겹지 않고 오히려 친근스럽고 순수하게 느껴진다. 불알이나 오줌, 똥 같은 하찮은 것일 지라도 눈썰미 있게 보아왔던 관심이 정다움을 느끼게 한다.

애기 이름을 붙인 풀꽃들도 더러 있다. 애기나리, 애기똥풀, 애기송이풀, 애기제비란꽃……, 이 세상에 애기처럼 순박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어디 있을까. 가만히 껴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꽃들이다.

외롭고 고단한 사람들에게도 위로하고픈 마음을 꽃에 담기도 했다.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배꼽, 홀아비꽃대, 처녀치마 등에선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다가서서 마주 잡아주는 마음의 손길이 보인다.

우리 풀꽃의 이름들에선 사람들끼리 나누는 체온과 인정만 있는 게 아니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새나 짐승들에게도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다. 까치수염, 갯까치수염, 큰까치수염……, 까치의 수염을 관찰하는 데도 얼마나 자세하고 치밀한 눈을 가졌던가를 보여준다.

개구리자리, 괭이눈, 봄까치풀, 뱀딸기, 벼룩나물, 범꼬리, 노루귀……, 이런 풀꽃들의 이름에선 자연과 인간의 삶이 함께 있음을 드러내준다. 동식물들의 생태와 호흡을 기막히게 알고 있다. 자연계 모든 생명체와 눈 맞추고 마음 맞춰 서로 아름다움을 느끼며 살아왔음을 볼 수 있다.

풀꽃들을 보면 우리 땅의 기운과 말과 눈짓이 느껴진다. 소박함의 미학과 소외에 대한 따스한 손길과 천연스러움의 미학이 깃들어 있다. 풀꽃들에 이름을 붙인 이는 누굴까. 산야에서 삶을 누렸던 서민들이리라. 이름을 붙였다기보다 무심결에 던진 말이 사람들의 공감을 받아 불러지면서 굳어졌을 것이다. 담담한 눈과 마음으로 평생 한 번 이름조차 불려질 것 같지 않은 외로운 풀꽃들에게 하나씩 이름이 붙여졌으리라. 우리말로 우리 눈으로 우리 느낌으로 붙여 놓았다.

바람, 이슬, 햇살, 비와도 마음이 통하고 곤충, 새, 짐승의 숨소리와도 닿아있다. 우리 산야에 뿌리를 묻고 그대로 벌판이 되고 풀숲이 되는 풀꽃은 계절이 뿌린 생명의 빛이요, 노래가 아닐까.

나는 화려하고 찬란하지 못할망정 비바람에도 뿌리 뽑히지 않고 제 일생을 온전히 꽃피우는 풀꽃이 되고 싶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흙 속에 바람 속에 이 땅의 마음속에 씨앗을 뿌리고 향기를 던지고 싶다. 나는 하나의 풀꽃이고 싶다. 소박하게 일생을 꽃피우는 풀꽃의 한 이름이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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