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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수필은 걸레다 / 유병근

부흐고비 2020. 7. 12. 08:38


걸레는 밥상에 올라가지 않는다. 밥상에 흘린 밥알과 김치가닥과 생선 뼈다귀를 훔치지 않는다. 상다리 바닥 주변에 엎지른 된장국물을 내시처럼 살살 훔칠 뿐이다.

밥상에 올라앉는 걸레가 있다면 그것은 결례다. 행주가 할 일을 함부로 차지하는 분수 모르는 얌체머리다. 남의 몫을 탐내어 가로채는 찰거머리, 그런 거지발싸개도 설치는 판국이다. 있는 허물과 없는 허물로 남을 짓밟고 헐뜯는 낯짝 두꺼운 인사가 버젓이 명함을 내민다.

그러나 걸레는 그가 할 일을 안다. 방바닥을 닦아내고 책장 아래 먼지를 닦아내고 창틀에 몰래 앉은 오래된 곰팡이를 쓸어낸다. 발바닥을 닦는 발걸레도 있다.

걸레가 되기 전에 걸레는 몸을 닦는 타월towel이었다. 머리에 쓰고 목에 걸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는 사이 타월은 올이 낡아 터지고 귀가 어긋난다. 어느 날 걸레란 이름으로 신분이 바뀌면서 아쉬운 일이지만 타월이 아닌 타월(他越)이 된다.

걸레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몸을 닦던 타월파가 있고 사시사철 알맞게 몸을 감싸주던 속옷파도 있다. 어느 것이든 새것일 때는 타월이었고 반듯한 속옷이었다. 세월의 흐름은 본래의 형태를 갉아먹고 새로운 형태인 걸레를 낳는다.

세상을 좀 크고 야단스럽게 산다는 걸레에 여간해서 손을 대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에서 때 묻은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아주는 걸레를 모른 척한다. 주위환경에서 문드러져 나올 수상한 먼지를 혹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찮은 것에 사대부가 마음 쓸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까.

하루는 걸레를 씻어 햇볕에 뽀송뽀송 말렸다. 그랬더니 뭐 또 닦아낼 구석먼지는 없을까 하고 나를 보는 눈치였다. 세상에 때 묻은 내 마음 속까지를 닦아준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다소 뜻밖이었다. 나를 닦고 찾는 또 다른 길이 걸레에 있다니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싸움 투(鬪)라는 글자는 그다지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창살을 가로지른 문안에 사람을 가두어놓고 두들겨 패는 피비린 거친 냄새가 글자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 글자를 이렇게 본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정서를 부추기는 시를 써두고는 그 교졸(巧拙)을 다투는 투시(鬪時)란 말이 떠오를 때는 투라는 글자는 사람을 콕콕 찌르는 송곳을 감추고 있어 보인다. 투계 투우 투쟁이란 말을 들어보아도 투는 어딘지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쥔 야멸친 형상이다.

싸움닭을 소재로 한 그림을 본 적이 있다. 퍽 오래 전이어서 분명한 기억은 없다. 일명 걸레스님의 작품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 또한 분명하지는 않다. 그림 제목은 <투계>이었지 싶다. 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허공을 할퀴는 매서운 장면과 시뻘건 피를 뒤집어 쓴 싸움닭의 맹렬한 눈빛이 불꽃을 내뿜는 인상파 화풍이었다.

투우인들 이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싸움 속에는 누가 살고 눅느냐의 피비린 경쟁심이 깔려 있다. 전투에 나간 군인은 그가 살기 위하여 죽음을 마다하고 적진으로 돌진한다.

세상이란 것은 어떤 점 싸움으로 찢어지고 거덜 난 걸레 아니던가. 달콤하다는 사랑이란 것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눈에 띄지 않는 맹렬한 경쟁 끝에 얻고 잃는 행운과 불운으로 점철된 연속극이다.

무슨 드라마 장면을 보다가 집안청소를 시작했다. 그동안 손이 닿지 않던 침대 밑바닥을 쓸고 닦았다. 걸레는 보기 흉한 몰골이 되었다. 하얀 부분과 새카만 먼지로 얼룩진 걸레의 희생을 보면서 어쭙잖게도 흑백걸레란 말을 속으로 하고 있었다. 흑백사진과 흑백티브이. 걸레가 조금 낯설었다.

걸레질을 하는 것은 낯설음과의 만남이라고 우긴다. 걸레로 빡빡 신발장 바닥에 앉은 먼지를 끌어낸다.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있는 걸레를 집어 든다. 현관바닥을 닦은 걸레는 담배씨만한 모래 알갱이와 흙먼지 같은 것을 이미 껴안고 있다. 낭패다. 글을 쓰는 눈에 군더더기 문장은 좀체 보이지 않던 흙먼지였다.

오! 마이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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