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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먼지가 책이다 / 유병근

부흐고비 2020. 7. 12. 08:47


책을 읽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때는 방안에 번듯이 누워 눈만 멀뚱거린다. 움직이는 무엇이 있으면 그나마 방안에 생기가 돌겠다는 어쭙잖은 생각에 끌린다.

어쩌다 움직이는 것이 있기는 하다. 먼지가 그것이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 심심하던 마음이 즐거워진다. 고놈도 심심했을까. 무슨 곡예비행이라도 하듯 꼬리를 치며 방안 여기저기를 날아다니고 있다.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거나 단독비행을 즐기는 놈도 있다. 이쪽 벽에서 저쪽 벽면 쪽으로 낙하산을 타듯이 방바닥으로 유유히 날아 앉는 놈도 있다. 우주유영을 하는 듯한 먼지의 세계가 뜻밖이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긴 세모꼴을 닮은 햇빛이 서치라이트처럼 먼지의 향방을 찾아준다.

먼지의 유영을 나는 조금 더 깊이 보기로 한다. 꽁지가 달린 세균처럼 아주 미세한 것이 쪼르르 다른 무리와 어울리는 듯하더니 이내 따로 떨어져 나오는 놈이 있다. 그러다가 낡은 장롱 위나 삐딱한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앉아 보기도 한다. 그것을 방해할 생각은 없다. 혹 먼지떨이를 들고 설쳐대면 먼지는 다시 공중으로 후딱 날아올라 나 잡아 보라며 굼뜬 나를 약 올릴 것은 뻔하다.

먼지가 날아가는 벽을 보다가 그쪽 벽지에 새삼 눈이 끌린다. 하얀 벽지에 은백색 무늬가 낯선 그림처럼 찍혀 있다. 전에는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았던 무늬다. 그것은 댓잎을 닮았다. 나는 그렇게 본다. 물론 달리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왠지 댓잎이라야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을 거듭한다. 이런 나를 무심하다고 무늬는 말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늬는 처음부터 댓잎이 되어 서걱서걱 댓잎 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했었다.

나는 간사한 아첨꾸러기처럼 댓잎이 수런대는 소리, 저녁마다 참새들이 대숲으로 모여드는 소리에 굽실거리듯 귀를 연다. 먼지가 댓잎 소리를 알려주다니 뜻밖이다. 먼지는 눈과 귀를 틔워준 셈이라고 싱거운 일이지만 마음으로 짐짓 먼지를 고마워한다. 못보고 못 들은 것은 그만치 내 눈과 귀가 방안의 미세한 사물에 무심했던 탓이라며 뉘우친다. 세상을 사는 숨찬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단순회로 탓이기도 했다며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댄다.

다시 날아다니는 먼지에 눈을 준다. 먼지 속에는 서걱거리는 댓잎 소리와 그 소리의 알갱이들이 높고 낮은 음표처럼 잠겨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은 은근하고 아득한 울림이 되어 있을 것이다. 먼지는 이를테면 남쪽에서 북쪽으로 즐거운 유영을 한다. 미처 듣지 못하는 세계를 먼지는 순수한 눈과 귀로 떠도는 듯하다. 먼지와의 교유(交遊), 나는 뜻밖에 마음이 즐거워진다.

먼지가 끼었다며 서둘러 걸레질을 하는 마음속에는 요까짓 먼지, 하는 먼지를 얕보는 심리가 있어 보인다. 인간이 미처 듣지 못하는 소리를 행여 들을지도 모르는 먼지부스러기에 대한 야릇한 반감이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있었다면 어떨까.

하기야 꾀바른 사람, 부티 나는 사람, 권세에 도취된 사람은 그러지 못한 사람을 먼지처럼 싹 따돌리거나 업신여긴다. 그런 재미로 어떻게든 더 큰 목소리와 지위를 찾아 입에 침을 튀기며 남을 깔아뭉개려 한다. 그만이 가장 정직하고 순수하고 진취적인 척 까발린다. 그렇게 되니까 순수는 어느새 힘이 세고 권세가 높은 사람의 몫으로 포장된다. 순수의 뜻이 이처럼 힘 있는 쪽으로만 몰리는 것은 힘의 단맛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단맛에만 끌리지 않는다. 먼지 같은 말없는 계층에 손을 들어주는 역사도 있지 않는가.

김병규의 [역사의 먼지](<목탄으로 그린 인생론> 문학세계사 1982)는 먼지를 보는 나에게 뜻밖의 위안이 된다. 파리의 시가지를 거니는 수필가는 거무튀튀하고 둔중한 석조건물에서 먼지의 아름다움을 본다. 예리한 지성은 여느 사람들이 놓치고 가는 먼지에서 역사의 부피와 무게와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런 투시력은 먼지처럼 작고 약한 인간에게 한없는 위안이 된다. 먼지가 날고 있는 내 방안이 운이 좋아 먼지의 아름다움으로 둔갑되리라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문득 하게 된다.

방에 누워 아직 가본 적이 없는 파리의 세느 강변과 미라보 다리를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먼지가 앉은 책상이 내 환상 속에서만은 미라보 다리가 된다. 책상 아래로 세느강이 흘러가는 물소리가 잔잔하다. 먼지 속에 강이 있고 소리가 있다니 어처구니없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그 흐름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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