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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통곡(慟哭)의 방 / 김선화

부흐고비 2020. 7. 11. 20:21



아무도 없는 방에서 울어보신 적 있나요? 저는 울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나약한 제 모습 보는 게 두려워 참았습니다. 한번 울기 시작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양동이의 눈물을 흘려야 했으니까요.

참고 참아도 눈물이 핑그르르 돌면 속 입술을 잘근 깨물며 견딘 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가 본능적 속심이 이성적인 현실을 이길 경우, 꼼짝 없이 봇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볼까 민망하여, 아니 누구에게 못난 모습 들키기 싫어 빈 방에 들어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누군가 방문 여는 소리가 나면, 한쪽 구석에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꺽꺽 목을 놓았습니다. 제3자가 말릴 엄두를 못 내게끔 이불자락으로 온몸을 돌돌 싸서 틀어쥐고 앙금이 죄다 토해지도록 용을 썼습니다. 울 장소가 정 마땅찮을 시, 재래식화장실에라도 숨어들어 오금이 달라붙도록 스스로를 소진했습니다. 다 처녀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헛 울음은 절대 울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차례씩 속을 비운 뒤에는 뭔가 답을 얻어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곁길로 돌아갈 수 없는 현실과 어렵사리 타협을 한다든가, 안에서 불뚝거리는 또 하나의 나를 아예 눌러 없애든가 하는 방식의 조율입니다. 그러니 그 울음이 쉽게 그칠 리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울고 싶다는 것은 다른 말로 '그리운 것이 있다'입니다. 억울한 심정 하소연할 곳을 찾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운다’는 것은 ‘하소연 할 일이 있다’입니다. 그 억울함을 외향적으로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안으로 기어들며 스스로의 심장을 후벼 파는 사람이 있는 것이겠지요. 그 무렵엔 대체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으로 인해 그러했지 싶습니다.

캄보디아 땅엔 실로 믿어지지 않는 성소(聖所)가 존재합니다. 세계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타프놈사원 내의 한 칸 방이 바로 그곳입니다. 스스로를 관음보살의 화신이라 여긴 자야바르만7세가 밀림 속에 대형사원도시를 이룩했다고 하지요. 이 사원은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곳으로,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적 유산 속에 든다고 합니다. 사원을 점령하고 있는 나무뿌리 군을 지나 내실로 향하면,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 속에서 암실(巖室)이 나타납니다. 트리모양의 창 하나가 하늘향한 이 방에서 그는 꺼이꺼이 울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다고 하지요. 독재에서 독재로 천하를 휘어잡은 권력자도 ‘어머니’ 앞에선 한없이 나약했던 모양입니다. 세상 어느 곳 그 누구에게라도 흉금 터놓을 수 없을 때, 중얼중얼 속 자리 부려놓을 곳이 필요했던가봅니다. 그 본능이, 가슴을 쳐야만 벽이 운다는 ‘통곡의 방’을 세상에 내놓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엉뚱한 당호(堂號)입니까.

저도 거기서 주먹으로 가슴을 쳐보았습니다. ‘웅~웅’하는 파동이 들렸습니다. 이번엔 허벅지를 힘차게 때려보았습니다. ‘퍽 퍽’하는 단음절뿐 별다른 울림이 없었습니다. 옆구리를 툭툭 쳐도 마찬가지, 다시 가슴을 두들기자 여지없이 우웅~웅 하며 징소리 같은 여음이 거무튀튀한 벽면에 흩어졌습니다.

연 전, 한가위를 앞두고 위대한 결별을 했습니다. 시어머님을 보내드렸습니다. 비보(悲報)를 들은 것은 추석 나흘 전 오후였습니다. 며칠 전 뵈러갔을 때만해도 의식이 또렷하셨는데 갑자기 돌아가셨답니다.

길을 서둘렀습니다. 전화벨이 연이어 울렸습니다. 맏동서가 자지러지는 음성으로 독촉하더니, 큰조카가 징징 울며 “작은아버지, 빨리 오세요.”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내 조용해졌습니다. 전화벨은 더 이상 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독한 항암제도 견뎌내신 분이 막상 가시는 길은 사고였습니다. 마을앞길에서 변을 당하셨습니다. 허망하다 할 새도 없이 땅에 꼭꼭 묻어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큰길에서 넋을 거두는 의식을 거쳐, 어머님의 집 내부를 몽땅 들어냈습니다. 시집와 20년 이상 정붙인 가옥에 미련이 남았지만 마음뿐이었습니다.

떠나시는 분은 그렇게 얼김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며느리는 그분의 언저리를 빙빙 돕니다. 어머님을 여읜 후 눈만 감으면 별의별 환영에 에워싸입니다. 요 며칠 제가 무슨 짓을 하였는지조차 몽롱합니다. 가시는 길, 그 마지막을 지켜드리지 못한 죄로 가슴 미어집니다.

저보다도 그분의 아들, 제 남편이 문제입니다. 추수철에 들길로 나들이를 나갔는데 풀씨 여무는 것을 보며 한숨입니다. “풀도 살쪘다. 소가 살찌겠다.” 풀이 여물어 그걸 먹은 소가 살찌겠다는 말입니다. 가히 철학입니다. 그 말 뒤에 가려진 속말을 저는 다 압니다. 강인한 생명력 앞에서 와락 그리움이 몰려온 것이지요.

울어야 합니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울고 싶을 땐 실컷 울어야 하는 것을요. 어디선가 펑펑 울어야 하는데 울 곳을 잘 몰라 헤매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찮은 풀을 보며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천 마디의 말보다 한번 우는 효과가 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웃음을 잃었을 때 얼굴이 그늘지듯, 울고 싶은 것을 참을 경우 가슴에 멍울이 생기니까요.

지금 통곡의 방에 든 사람이 어찌 제 남편뿐이겠습니까. 세상의 숱한 남성들이여! 체면 잠시 접고 우십시오. 가슴을 치며 엉엉 어머니를 찾으십시오. 그 곡조 하늘에 닿아, 어머니께서 꿈길로 오실지 혹시 압니까. 오늘 밤, 베갯잇이 흠뻑 젖도록 펑펑 울어 어머니를 맞으십시오. 가슴 속의 서러운 일 다 토하며 주먹 야무지게 쥐고 심장부위를 힘껏 두들겨 보십시오. 그리하여, 그토록 그리던 따스한 가슴에 안기어 단잠 주무십시오. 백 살까지 철 안 드는 어른으로 남을지라도 그게 뭐 대수이겠습니까. 관용(寬容)의 제왕 어머니를 친견하는 길일진대.

그리고 부디 그 은밀한 방에서 바깥쪽으로 문을 밀 땐, 슬픔의 너울일랑 먼 강가에 뿌려두고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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