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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매화찬 / 김진섭

부흐고비 2020. 7. 16. 14:09

나는 매화를 볼 때마다 항상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감정에 붙들리고야 마는 것을 어찌할 수 없으니, 왜냐 하면, 첫째로 그것은 추위를 타지 않고 구태여 한풍을 택해서 피기 때문이요, 둘째로 그것은 그럼으로써 초지상적인, 비현세적인 인상을 내 마음속에 던져 주기 때문이다.

가령 우리가 혹은 눈 가운데 완전히 동화된 매화를 보고, 혹은 찬달 아래 처연히 조응된 매화를 보게 될 때, 우리는 과연 매화가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잘 알 수 있겠지만, 적설과 하늘을 대비적 배경으로 삼은 다음에라야만 고요히 피는 이 꽃의 한없이 장엄하고 숭고한 기세에는, 친화한 동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굴복감을 우리는 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매화는 확실히 춘풍의 태탕한 계절에 난만히 피는 농염한 백화와는 달라, 현세적인, 향락적인 꽃이 아님은 물론이요, 이 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초고하고 견개한 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어서 찬 돌같이 딱딱한 엄동, 모든 풀, 온갖 나무가 모조리 눈을 굳이 감고 추위에 몸을 떨고 있을 즈음, 어떠한 자도 꽃을 찾을 리 없고 생동을 요구할 바 없을 이 때에, 이 살을 저미는 듯한 한기를 한기로 여기지 않고 쉽사리 피는 매화, 이는 실로 한때를 앞서서 모든 신산을 신산으로 여기지 않는 선구자의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꽃이랄까?

그 꽃이 청초하고 가향이 넘칠 뿐 아니라, 기품과 아취가 비할 곳 없는 것도 선구자적 성격과 상통하거니와 그 인내와 그 패기와 그 신산에서 결과된 매실은 선구자로서의 고충을 흠뻑 상징함이겠고, 말할 수 없이 신산한 맛을 극하고 있는 것마저 선구자다워 재미있다.

매화가 조춘 만화의 괴로서 엄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화하는 것은, 그 수성 자체가 비할 수 없이 강인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동양 고유의 수종이 그 가지를 풍부하게 뻗치고 번무하는 상태를 보더라도, 이 나무가 다른 과수에 비해서 얼마나 왕성한 식물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거니와, 그러므로 또한 매실이 그 독특한 산미와 특종의 성분을 가지고 고래로 귀중한 의약의 자료가 되어 효험이 현저한 것도 마땅한 일이라 할밖에 없다.

여하간에 나는 매화만큼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꽃을 달리 알지 못한다. 특히 영춘 관상용으로 재배되는 분매에는 담담한 가운데 창연한 고전미가 보이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청고해서 좋다.



김진섭(1930~?): 수필가, 독문 학자. 호는 청천. 전남 목포 출생. 일본 호세이 대학 졸업. 서울대 교수. 6.25사변 때 납북됨. 저서로 "인생예찬" "생활인의 철학" 등이 있다. 한국 수필 문학의 개척자. 생활의 예지와 감흥을 가지 넘치는 생활 철학의 발견으로까지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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