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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등 / 문혜란

부흐고비 2020. 7. 26. 22:01

사제 서품식을 지켜본 적이 있다. 맨바닥에 몸을 대고 납작하게 엎드린 사제의 등을 보고 있으니 목덜미에 가래톳이 돋았다. 마주 포갠 손등에 이마를 대고 다리를 곧게 뻗은 모습이 더는 낮아질 수 없는 자세였다. 짧은 순간이 심어 준 긴 여운은 등을 향한 신뢰와 연민으로 깊게 남았다.

정면에서는 빤히 쳐다보지 못하는 소심함에서 비롯된 버릇이기는 하나 나는 타인의 등을 즐겨 바라본다. 길을 걷거나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행인의 등에 자주 눈길이 머문다. 어깨를 곧게 펴고 경쾌하게 걷는 젊은이의 등에는 자신감이 넘쳐서 덩달아 기분이 좋다. 손수레를 밀고 가는 노인의 휘어진 등 위로 내리쬐는 칠월의 햇볕이 야속한 날도 있다. 수굿한 등에서는 생각의 깊이를, 쓸쓸한 등에서는 그리움의 깊이를 점쳐 본다. 나부의 그림을 볼 때도 어깨와 등에 더 마음이 끌린다.

등에는 장식이 없다. 머리에는 모자, 눈에는 안경, 귀에는 귀걸이, 목에는 목걸이, 손에는 반지, 발목에도 발찌가 있다. 하다못해 코나 혓바닥, 보이지 않는 배꼽에도 링을 끼워 멋을 부린다. 사대육신 다 치장을 하는데 등에만은 장신구가 없다.

발달된 성형 기술은 어떤 부위든 마음만 먹으면 고칠 수 있다고 하나 등을 성형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교묘한 화장술로 남장을 한 여자이거나 여장을 한 남자라도 등은 속일 수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얼굴로 대표되는 앞모습에 비해 꾸미지 않는 등이 더 본질적이기 때문일 게다.

누군가 그리워질 때는 첫 번째가 눈이고 그 다음은 등이 떠오른다. 쉰 줄의 초반에 이승을 떠나신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도 구부정한 등으로 남아 있다. 업혀 본 사람은 등의 부드러움과 아늑함을 잊지 못한다. 무언으로 위로나 신뢰감 같은 속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나는 등 뒤에서 감싸 안는다. 반대로 누군가 내 등을 쓸어 줄 때는 공감의 표현이거나 사랑하고 용서한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표정과 손짓, 발짓, 언어로 표현하는 앞면은 복잡하다. 상대의 얼굴 표정에 따라 속마음을 판별해 내야하고,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그것이 미칠 파장을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일단 등을 돌리면 하나의 풍경에 불과하다. 앞품을 내어 주는 것은 감추어진 의도가 있을 수 있지만, 뒤품을 내어 주는 것은 무장 해제한다는 뜻이며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동지이다.

등은 어떤 것도 거역할 수 없는 순종의 기관이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맡은 고독한 부위다. 가장의 등에서 고래를 볼 때가 있다. 다닥다닥 달라붙은 고착물들을 평생 등에 달고 사는 혹등고래. 관리비, 등록금, 국민연금, 카드 결제비, 대출금 이자, 날마다 늘어나는 무생물의 혹들. 붙은 혹들이 커질수록 더 멀고 거친 바다로 헤엄쳐 나가야 하는 가장의 등은 늘 구부정하다.

등은 열등한 것들의 은신처이기도 하다. 속임수에 이용되어도 방어 능력이 없으며 심장과 가까우면서도 외져서 자신의 손조차 닿지 않는 곳. 더러 배반의 의미로 등을 말하지만, 감추어진 속내를 대신 떠맡은 기관에 불과하다. 마음이 실릴 뿐,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모든 욕망이 배제된 신체부위. ‘등 빌려 줄까?’ 이 말은 내가 가까운 이에게 건네는 가장 친근한 애정 표현이다.

등은 이면이다. 생의 이면을 보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이다. 우리 사는 일이 날마다 잔치가 아니어서, 보이고 싶지 않은 더 많은 것들은 이면에 있는 탓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는 범법자라도 등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프다. 등에서 그 사람의 속마음을 짚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세를 벗어 버리면 참으로 박소한 게 인간이 아닌가. 진실과 솔직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면, 등에는 말보다 강한 전달의 힘이 있다. 허약한 것에 대한 본능적 연민이기도 하다. 자기 몸의 절반이지만, 보여 주기는 해도 스스로는 볼 수 없는, 오로지 타인에게로만 열린 또 하나의 표정. 누군가 내 등을 유심히 본다고 느껴지면 나는 내 전부를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지곤 한다.

대부분의 불화는 이해 부족에서 생긴다. 그럴 때, 상대방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어떨까? 결코 굽어지지 않을 것 같은 대쪽인 사람도 등에서는 여린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와 불화가 생길 때면, 그래서 쉽게 용서되지 않을 때는, 한참씩 그 사람의 등을 바라본다. 그러면 미움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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