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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속미인도(俗美人圖) / 이병식

부흐고비 2020. 7. 31. 22:58

대구미술관에서 ‘간송 조선회화 명품전’이 열리고 있다. 간송은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한 사람이다.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석탑, 석불, 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도 힘을 썼다고 한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 불상, 석불, 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 미술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지인들 몇몇이 어울려 간송의 명품들을 보기 위해 갔다.

조선 시대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많이 걸려있다. 신윤복의 미인도 앞이다. 그림을 잘 그렸는지 미인도가 품격이 있어서인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마치 신윤복 회화전인 듯 안내 책자의 표지 그림도 미인도다. 유교 사상이 지배하여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에 신윤복은 과감하게 여인의 몸을 그렸다. 후대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볼 것을 예상이라도 했을까. 그것은 그 시대의 파격이었다.

신윤복이 그린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을까, 당시 사회 제도상 일반 살림집 규수는 외간 남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그림의 주인공은 아마도 풍류 세계에 몸담고 있었던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렴 어떠랴, 나는 현대인의 감각으로 미인도를 더 깊숙이 들여다본다.

가체 얹은머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 가발은 현대 여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닌가 보다. 조선의 여인들도 가발을 썼으니 말이다. 미를 바라보는 눈은 옛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앳된 둥근 얼굴에 초승달 같은 눈썹과 맑은 눈이 예쁘다. 오뚝한 콧날 밑으로 열망을 가득 담은 채 물오른 앵두처럼 터질 듯 붉게 부푼 입술이 시선을 끈다. 그런데 얼굴에 표정이 없다. 입술을 위아래로 살짝 벌려 옥수수처럼 배열된 백옥 같은 치아가 드러나게 환하게 웃는 얼굴이었다면 어땠을까. 귀밑머리에서 가냘프게 흘러내린 목선과 좁은 어깨가 단아한 아름다움을 준다. 아마도 신윤복이 쇄골미인을 알았다면 저고리를 살짝 벌려 가느다란 어깨선에 이어 쇄골을 그리고 싶지 않았을까.

가슴이 드러날 만큼 옷기장이 극도로 짧아지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아진 저고리를 입고 속에 무지개 치마를 받쳐 입어 열두 폭 큰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인의 관능미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자태다.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띠 끈과 일부러 고름을 매지 않고 풀어헤친 진자주색 옷고름은 사내의 육감적 정서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저고리의 옷고름을 살짝 풀어 옷깃을 젖힌다. 신윤복의 여인은 어떤 젖무덤을 가졌을까. 수박 반만 한 풍성한 젖무덤을 가진 육감 있는 여인이었을까, 아니면 7월의 수밀도처럼 물오른 통통한 젖가슴을 가졌을까. 그리고 유두는 붉게 익은 버찌처럼 생동감이 있을 것이다.

가냘픈 손가락으로 치마끈을 살짝 풀어헤친다. 치마가 사르르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뽀얀 허리가 드러난다. 피부 색깔은 어떨까. 요즘에야 돈을 들여 피부를 검게 그을리기도 하지만 아마도 그때는 피부가 검으면 거의 다 농사짓는 아낙이거나 천민 계급의 여자였을 것이다. 더구나 아름다움을 생명처럼 여기던 기생이었다면 말해 무엇하리. 아마도 우윳빛 피부를 가졌을 것이다.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뽀얀 피부의 여인이지 싶다.

개미처럼 가는허리의 몸매를 가진 팔등신 미인은 아니었지 싶다. 조선의 여인은 아이를 잘 낳게 생긴 펑퍼짐한 엉덩이와 튼실한 허리를 가진 여인을 미인의 기준으로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해도 화가 신윤복은 가는 허리의 늘씬한 여인을 선망했는지도 모른다. 요즈음 눈으로 보는 팔등신 여인 말이다.

여인의 엉덩이는 어떤 모양일까. 흥부네 집 지붕 위의 하얀 박과 같이 크게 생겼을까. 아니면 현대 여성의 사과 모양 엉덩이처럼 탄력 있게 올라붙었을까. 아무래도 조선 시대의 미인의 기준은 자식의 생산에 맞추어져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는 해도 그림의 여인은 뭇 남자를 유혹하고 뇌쇄시키는 기녀가 아니던가. 여염집 여자들과는 좀 다른 미인의 잣대를 가졌을지 어찌 알겠나.

치마 밑으로 오이씨 같은 하얀 버선발을 살짝 내밀었다. 버선 속의 엄지발가락엔 봉숭아꽃물이 붉게 들었을 것이다. 첫눈 올 때까지 지워지지 않아 첫 정인과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말이다.

미인도 감상에 너무 몰입했었나. 고개를 들어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다른 사람들도 내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감상했을 거로 생각하면서. 그런데 뒷골이 살짝 당기는 것 같은 기분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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