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학이란 무엇일까? 왜 우리의 삶에 문학이 있어야 하는가. 문학이 주는 무엇을 어떻게 소유하여야 하는가. 그런 보람을 매일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매번 이러한 의문을 품는다. 문학이라는 괴물 아닌 괴물이 내가 살고 싶은 삶의 본질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문학은 체험을 언어로 형상화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체험은 1차원적이고 생리적인 것이 아니라 특별하고 독특한 경험을 말한다. 늘 평범한 것에 비범한 무엇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 정체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사람"으로서 우리가 인상 깊다고 여기는 것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더 큰 기쁨과 아픔으로 이것을 느낀다. 그 발견을 말하고 싶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21세기는 지난 시대와 판이하게 다르다. 50여 년 전과 비교하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5세대 컴퓨터, 기가 단위의 스마트폰, 무인화된 자동차는 제쳐두고라도 전자 밥통, 전자 세탁기, 진공소제기, 자동개폐기… 집안에서 나무와 꽃이 사라지고 알루미늄과 금속 철판이 우리를 포위한다. 덩달아 즉물성과 속도성도 증가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IT산업이 발달한 나라에 속한다. 광케이블이 신경세포처럼 인적 드문 시골까지 깔려 모든 생활이 CCTV의 보호를 받는가하면 감시도 받는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받는 새로운 현상이 늘어간다. 문학이 한때 인간을 계도하고 지성과 감성을 지켜주었지만 지금의 인간은 마치 문학이 있어도 소형기계처럼 작동할 따름이다.

이런 과도기에 요긴한 것은 역설적으로 아날로그적 동력이다. 그것만이 상상력과 감수성을 복원해준다. 인간은 감성을 가진 제4로봇 제작에 용을 부리면서 진작 자신은 감성과 상상을 상실하고 있음을 잊고 있다. 오늘날 인문학과 문학이 다시금 힘을 얻는 이유도 이 결핍증을 치유해주는 것이 문학임을 각성하기 때문이다. 오직 문학만이 영혼의 쉼터를 제공해 준다.

왕년에 "문학청년" 이 아니었던 사람이 드물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훗날 먼 훗날 나는 어디선가 / 한숨 쉬며 말 하겠지요 /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들 발자국이 적은 길을 택했노라고"(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하는 구절이 생각나서 한숨을 쉰다. 인기 TV 드라마를 보다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 내 마음 뛰노나"(워즈워드: 「무지개」)라는 구절이 떠올라 "내가 왜 요렇게 살지." 하고 탄식한다. 이처럼 잊혔다가 생각난 구절 하나가 마음을 누르기도 하고 펴주기도 한다.

시의 감성은 꽃이고 빛이다. 영국시인 러버크(1879~1965)는 "태양은 우리에게 빛으로 말하고 꽃은 우리에게 향기와 빛깔로 말을 한다."고 했듯이 시는 인생을 물들인다. 아무리 푸짐한 음식을 테이블에 잔뜩 차려놓아도 음악과 시 한 편이 없으면 연애할 마음이 우러나지 않는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사진사 로버트와 유부녀 프란체스카의 사랑도 예이츠의 시 <방랑자 앵거스의 노래>에 나오는 "달님의 은빛 사과들을 / 해님의 금빛 사과들을"을 읊조린 순간부터 시작한다. 시문학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맛깔스러운 음식이다. 태양이 모든 꽃에 나름의 색깔을 선물하듯 시는 인생에게 나름의 사연과 휴식을 선사한다.

많은 사람이 시를 좋아하지만 시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른이 됐다고, 가장과 주부가 되어버렸다고 시성詩性을 멀리할 수는 없다. 우리가 무엇이 되든 문학을 사랑하는 마음까지 몽땅 잃을 수 없다. 감수성이 이는 부모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식을 더 훌륭하게 키울 수 있고 친구의 아픔도 더 잘 이해한다. 자식과 권위만을 뽐내는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독일 낭만파 작곡가 슈만은 "시인은 사람들 마음에 빛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시는 마음의 창을 열어 혼탁한 실내공기를 뽑아내고 건강한 혼과 기를 불어넣어 준다. 시인이 아니어도 시심時心은 버리지 않아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책은 지루하고 어려워 읽지 않으려 한다. 신포도 이론을 빌려 소설은 지루하고 수필은 시시하다고 여긴다. 밥 빌어 먹기도 힘들다. 살기에 급급하다. 문학은 돈이 안 된다. 글은 나와 상관이 없다. 핑계가 왜 그렇게 많은지, 한마디로 말하면 살기 싫고 인생 공부하기 싫다는 것이다. 살면서 사는 공부가 싫다면 안 살아야지, 여기에 수필과 산문을 읽어야 하는 명분이 생긴다.

살수록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친다. 육체적 질병은 고칠 수 있으나 정신적인 피로는 감기처럼 쉬 회복되지 않는다. 피곤한 마음을 위로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눈요기 먹방이나 트롯트 프로가 아니라 마음일 지켜줄 한 편의 수필이다. 수필이 시시한 것 같지만 시시때때로 시보다 더 효험을 지닌다. 무언가 새롭게 보고 느끼고 살피도록 해준다.

시가 창의 유리라면 수필은 창문틀이다. 창문틀이 없이는 유리창은 세울 수 없다. 시만 읽으면 오히려 위험해진다. 시와 소설을 읽으려면 수필을 먼저 대하여야 한다. 수필은 이렇게 살아라고 일러줄 뿐 아니라 문장과 시행詩行을 읽는 법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시가 봄날 매화이고 소설이 여름날 해바라기라면 수필을 오래 묵어야 피어나는 가을국화라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채근담>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글자가 있는 책은 이해하지만 글자가 없는 책은 이해하지 못한다. 줄이 있는 거문고는 탈 줄 알지만 줄이 없는 거문고는 탈 줄 모른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듣는다면 어찌 인생의 참맛을 깨닫겠는가. 이때 수필은 줄 없는 거문고처럼 은근하게 진리를 풀어낸다. 예로부터 산문은 천지인天地人을 결합하므로 자연과 인생을 퉁기는 사유의 문이 된다 하였다. 우리가 진정 소홀히 여기기 쉬운 것이 이런 인생의 창문틀이다.

수필은 현실과 실재 삶을 보호해주는 막과 같다. 시적 감수성과 소설적 구성으로 자연과 인생을 결합하듯이 수필의 생명은 문장이 아니라 진지하게 끄집어낸 인생의 발견에 있다. 돌아가신 아버지, 시집간 딸, 군대에 간 아들, 첫 손자의 조막손… 시와 소설도 이런 소재를 중시한다. 하지만 수필 속의 삶은 더욱 절절하고 진실하다.

그러니 수필 독자는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읽어야 한다. 장님이 손가락 끝으로 한 자 한 자를 더듬어 가슴으로 익히듯이 마음이 글을 읽을 줄 알게 될 때 비로소 수필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수필은 초심初心과 종심終心이 아니라 그 둘을 잇는 항심恒心의 줄이다. 가야금이 손으로 뜯는 시라면 줄대로 켜는 거문고가 수필이리라.

​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는 "시는 빛깔의 소리를 듣고 소리의 향내를 맡아 감각적 언어로 창조하는 것"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숨겨진 재야의 최고 문장가 혜원 이용휴는 「행교유거기」杏嶠幽居記에서 "이 작은 방에서 몸을 돌려 앉으면 방위가 바뀌고 명암이 달라진다." 라고 산문의 문도文道를 단칼에 정의내렸다. 명산문은 집이 아니라 사람 몸의 방향을 바꾸도록 일러주는 비결임을 전수해주는 글이다.

아르헨티나 루이스 보르헤스(Borges · 1899~1986)는 '도서관의 작가'란 별칭을 갖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 문학에 담긴 갖가지 감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사랑, 이별, 탄생, 죽음, 분노, 불안, 행복, 절망, 고통, 신앙, 존경, 공포, 우정, 동경, 신념, 고독, 환상, 좌절, 욕망, 광기, 지구상의 삶이 모두 다를지언정 감정이라는 근원은 같다. 작가는 이런 감정을 조합하여 창을 만들어야 한다. 쟁기와 칼이 손의 도구라면 언어는 마음의 연장이 아닌가. 그런 언어망을 이룬 책은 나태의 버릇 앞에 무릎을 꿇지 못하게 하는 쇠침과 같다.

제대로 살고 제대로 글을 쓰려면 책을 늘 지녀야 한다. 책을 넣은 핸드백을 쥔 사람은 한 명의 마법사이다. 세상을 보는 거울을 가지고 있으니까. 어떻게 글을 써야할지 막막하면 먼저 책이란 창을 열자. 그 순간에 문학과의 뜨거운 재회가 다시 시작한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의 방 / 류창희  (0) 2020.08.11
어머니의 ‘뽕브라’ / 조현세  (0) 2020.08.10
광야를 달리는 말 / 김훈  (0) 2020.08.05
고등어와 크레파스 / 이현세  (0) 2020.08.05
가랑잎처럼 / 허세욱  (0) 2020.08.04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