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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고등어와 크레파스 / 이현세

부흐고비 2020. 8. 5. 16:18

나는 태어나자마자 큰집에서 양자로 자랐다. 6‧25 전쟁 통에 큰아버지가 딸 둘만 남기고 돌아가셨으므로 작은집의 장남인 내가 양자로 간 것이다. 그 사실은 할머니의 엄한 함구령으로 내가 다 클 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말해 주지 않아서 나는 전혀 몰랐다. 젖을 떼자마자 아버지는 나를 큰어머니에게 넘겨주며,

“이놈은 이제 죽든 살든 형수님의 자식입니다.”
하고는 평생동안 두 번 다시 나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만주 사변으로 할아버지를 잃은 할머니는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어린 아들 셋을 데리고 고향 울진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길쌈으로 어린 아들 셋을 키우셨다. 그러다가 6‧25 전쟁 통에 맏아들과 둘째를 잃고 막내인 아버지만 할머니 곁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셨다. 그때 우리가 사는 흥해 하천 앞에는 몇 킬로미터가 족히 되는 넓은 자갈땅이 있었다. 가난한 아버지는 적은 돈으로 값싼 자갈땅을 사서 개간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간을 해도 자갈땅이긴 마찬가지여서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어야 할 지경이었다. 자갈땅을 일구느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손톱이 다 빠질 정도였다.

아득한 내 기억의 끝을 거슬러 올라가면 거기에 자갈땅이 있다. 봄철에 언덕에서 달래와 냉이를 캐다가 뱀을 보고 놀라 달아나던 어머니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고, 대문 앞에는 넓은 미나리꽝도 있다. 또 그해 여름 내내 이삭이 나올 때까지 개간한 논고랑에서 혼자 미꾸라지를 쫓던 다섯 살 먹은 내 어린 모습도 있다.

긴 여름이 가고 들에 누런 물결이 일렁일 즈음에 우리 가족은 흥해에서 첫 수확을 맞았다. 그 시절에 개간이란 엄청난 모험이었던 까닭에 당연히 수확을 맞은 아버지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사라호 태풍이 전국을 뒤덮었다. 그래서 제방이 터지고 홍수가 몰고 온 자갈과 모래가 개간한 논을 덮어 버려서 나락을 한 톨도 수확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는 밤새 절망과 안타까움으로 황토물에 떠내려가는 나락을 한 톨이라도 건지려고 허우적대고 다니셨다.

우리 가족은 그해 겨울내내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래도 아버지의 고집은 꺾이지 않아서 그 이듬해에도 다시 그 땅을 개간했다. 그러나 자금이 모자라 지난해의 절반도 개간을 못한 터에 흉작까지 겹쳐 그 겨울도 우리는 보리죽을 먹으며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그 뒤로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조각난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적에 아버지 손을 잡고 처음으로 사진을 찍었던 일과 나무하는 데에 따라갔던 일, 여름철에 재래식 방법으로 마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만드시던 모습과 강에서 나를 목말을 태우고 조개를 채집하시던 일.

아버지는 어쩌다 해질녘에 약주 한 잔에 얼큰해진 모습으로 큰집에 와서는 할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사는 걸 죄스러워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아버지가 모시려고 해도 할머니가 완강하게 장손 집에서 기거하겠다고 하셨다. 할머니의 그 고집 한편에는 어린 나에 대한 걱정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가 그토록 큰집에 자주 들르신 것도 실상은 내가 보고 싶어서였음이 이제야 헤아려진다. 그뿐만이 아니라 한 번도 나를 안아 주시지 않던 어머니와 어쩌다 내게 오는 아버지의 손길을 꺼리시던 할머니와 큰어머니의 속내도 그때의 나에게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일들 이었다.

한번은 식구들이 저녁상을 놓고 둘러앉았는데 아버지가 들어오셨다. 일어나서 같이 드시기를 권하는 두 누님들처럼 나도 아버지를 반겨 맞았으며 아버지가 얼마나 흡족해하셨을까? 그러나 나는 모처럼 상에 오른 고등어에 정신이 팔려 고개도 들지 않고 밥 먹는 데만 열중하였다. 크게 화가 난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에게 회초리를 들었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당하는 호된 매에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작은아버지 집에 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왜 때려?”

하고 바락바락 악을 쓰는 나를 할머니가 감싸 안아서 매질을 피하게 해 주셨다. 저녁 시간에 갑자기 나타나서 밥을 양껏 못 먹게 한 아버지를 원망하던 철없는 아들을 뒤로하고, 밥 한 술 뜨지 않고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신 당신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러나 아버지는 큰어머니가 하시는 잡화점이 그럭저럭 장사가 되는 덕분에 자식이 세 끼 밥이나마 배불리 먹는 것을 작은 위안으로 삼으며 가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즈음 아버지는 경주역의 기차 수리 공장에 취직하셨다. 모처럼 으스대는 걸음걸이로 들어오셔서 첫 월급봉투에서 할머니 용돈을 드리며 어린애 마냥 좋아하시던 것이 이제는 가장 그리운 모습으로 남아 있다.

유월도 중순으로 치달아 매미 소리가 들렸음직한 어느 날로 기억한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그날 나는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만을 안달하며 기다렸다. 그 이틀 전에 모처럼 들른 아버지에게 크레파스를 사야 한다고 졸랐더니 선뜻 돈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머니에 돈을 넣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길거리에는 정말 재미있어 보이는 만화가 있었고, 서부 영화 포스터가 있었으며, 군것질거리가 풍족했다. 나는 그 유혹을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영화는 정말 재미있었고, 만화책을 보며 주머니에서 과자를 하나씩 꺼내 오도독 씹어 먹는 맛은 처음으로 느껴 보는 즐거움이었다.

해가 뉘엿뉘엿 진 다음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집에 돌아왔다. 이불 속에 누워서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 사이에 꾀가 한 가지 생각났다. 아버지가 다시 오셔서 크레파스를 확인하기 전에 큰어머니에게서 돈을 타서 사고, 가능하면 아버지와 큰어머니에게 따로 보여 드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침이 되니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학교에 갔다.

그날 저녁에 전쟁놀이로 해 지는 줄 모르고 놀던 내가 큰누나에게 끌려가다시피 하여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머리끝이 다 솟구쳤다. 저녁상을 놓고 둘러앉은 가족 속에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아버지가 연이틀 큰집에 오시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 밥숟가락을 드는 내게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는 크레파스를 구경하고 싶다고 하였다. 엉겁결에 나는 아버지가 돈을 준다고 하고는 그냥 가셨다고 둘러댔다. 맙소사! 정말이지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버지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돈을 주신 것이다.

그 이튿날 새로 받은 돈을 들고 바로 달려나가 크레파스를 샀다. 그러나 주머니에는 그 이틀 전에 쓰고 남긴 돈이 들어있었다. 교실에 앉아서 손에 만져지는 동전의 감촉에 정신을 팔고 있는데 느닷없이 작은누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우리 교실에 뛰어 들어왔다. 나는 작은누나를 따라 마구 뛰었다. 소방서에서는 열두 시를 알리는, 점심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대고 있었다. 기차 수리 공장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사람들로 마당이 가득 차 있었다. 사무실 앞에 할머니와 큰어머니, 작은어머니(어머니)가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계셨다. 먼저 온 큰누나가 울고 서 있었고 잇달아 작은누나도 울음을 터뜨렸다. 사무실 한 귀퉁이엔 두 동생이 무심히 흙장난에 열중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었다. 누전사고였다. 전선이 끊어져서 땅바닥에 깔린 것을 당신이 미처 보지 못하고 밟아서 생긴 사고였다. 흰 무명천을 들치고 보니 아버지는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것이 내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지만, 사실은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죽음을 알기에는 너무 어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내 작은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삼일장으로 치러졌다. 멋쟁이처럼 웃고 찍은 아버지의 사진을 뒤로하고 시신을 불에 탔겠지만 나는 보지 못했다. 그보다는 보지 않았다는 편이 정확하다.

나는 할머니와 두 어머니가 그렇게 말리는데도 기어코 학교에 갔다. 죽어도 학교에 가야한다고 장례식도 안 보고 간 어린 철부지를 두고, 차마 돌아가신 이가 네 아버지라고 말해 줄 수 없었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학교에서 조퇴를 하고 온 내가 친척 손에 끌려서 화장터로 갔을 때는 이미 아버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고, 타다가 만 뼈 몇 조각과 재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때서야 내게도 슬픔이 다가왔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아버지에 얽힌 추억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이 아버지의 죽음으로 얼마나 절망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냈는지, 아들 셋을 모두 잃은 할머니의 한숨과 통곡이 어떠했는지, 아버지 죽음의 보상으로 방 안 가득 쌓인 쌀가마니를 보며 그 쌀을 날마다 한 줌씩 퍼내서 밥을 지으시던 서른 살의 어머니가 어떤 세월을 살아왔는지, 철없던 내가 다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난이 늘 쫓아다녔다는 것과 그래서 서로 아끼고 결속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나는 내 출생의 내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로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무 살 되던 해에 우연히 방학을 맞아 들른 고향에서 아버지의 함자에 내 이름이 자식으로 따라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중 어른들은 도리어 내가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집안에서 가장 큰 남자로서 제주가 되었고, 해마다 여름이 오기 전 그날이면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담담하게 당신의 혼백을 만났다. 그러나 어째서 당신 제상에 삼 년 터울인 동생를 두고 내가 제주가 되어야 하는지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또 그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시던 어머니를 어쩌면 그렇게 무심히도 세상에서 가장 착한 작은어머니로만 생각하고 지내 올 수 있었을까? 나는 미련하고 둔한 나 자신에 질식할 듯했다. 두 동생까지도 알고 있었으면서 온 가족이 한순간도 내색을 하지 않고 나를 대해 왔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날마다 술을 마시고 몸도 가누지 못한 상태로 어머니를 찾아갔으며, 한마디 말도 없이 쓰러져 잠을 잤다.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였음을 알고 나서 새롭게 되새겨지는 그 많은 기억 속에서 유독 나를 괴롭힌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를 속였던 크레파스 대금. 정말 속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 앞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당신이 알면서도 속아 준 것은 아니었을까? 분명히 담배 한 갑도 귀한 형편이었을 당신이 그 큰돈을 내게 준 사실을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로 보낸 자식이 열 살의 나이로 태연하게 당신을 속이고 있는 모습에 얼마나 슬퍼하셨을까? 작업 시간 내내 어린 자식 놈만 생각하지 않았다면 끊어진 전깃줄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당신의 죽음은 없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장례식 날 학교를 간 내 행동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 행위 자체가 이미 불효였겠지만 그것이 학교는 어떤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생각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당신을 속인 것에 대한 죄의식이 작용한 것이었는지 다시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한 달 내내 괴로움에 빠져 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어느날 아침, 누군가 가만히 내 방에 들어왔다.

“네가 나를 봐서라도 이래서는 안 된다. 더운밥 한 그릇 제대로 못 먹인 너는 내 가슴을 후벼 판 자식이다.”

짤막한 그 한마디 말씀이 쇠못처럼 내 가슴을 꿰뚫고 들어왔다. 머리 한 번 짚어 보시지 않고 어머니는 나가셨지만, 가늘게 떨리기까지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에서 전해져 온, 그 평생의 한을 토해내는 듯한 느낌을 나로서는 글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한순간에 아들의 눈빛을 읽으신 어머니와 이십 년 동안 어머니의 눈빛을 읽지 못한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아울러 한순간에 아들의 눈빛을 읽으신 아버지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눈빛을 읽지 못한 아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당신은 분명히 내 거짓말을 읽었을 것이고 상처받지 않게 나를 위기에서 구해 주신 것이다.

나는 학업을 포기하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일년내내 마음만 먹으며 햇빛 한 번 보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만화 그리기를 직업으로 선택했다. 나는 3년 동안 집에 가지 않았고 어느 한 구석에서나마 쓸모있는 인간이 된 나를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고 싶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나는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가족을 위해 웃음을 던질 수 있었던 아버지를 생각했고, 그런 아버지를 그리고 싶어 했으며, 아들과 같이 흙구덩이 속에서 전쟁놀이를 할 수 있는 아버지를 그리고 싶어 했다. 잃어버린 아버지와의 세월을 되찾고 내게 주고 간 당신의 소리 없는 사랑을 그려 죄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쩌면 그럼으로써 혈육을 못 알아보고 흘려보낸 지난 시간까지도 보상받고자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와서 나는 내가 그런 아버지를 끝내 그릴 수 없었던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조건 없이 사랑을 준 당신을 그리려면 나도 당신을 조건 없이 맞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존경하는 아버지의 업적을 적을 것도 없고 짧기만 했던 당신 인생을 비판해 볼 수도 없다. 다만 당신과 보낸 세월이 하도 허망하여 한 조각 하찮은 기억들이라도 안타깝게 붙잡아 볼 뿐이다.

어느 날 내게 정말 아버지의 존재가 가까이 다가오는 날, 당신이 그렇게 즐기면서도 한 번도 마음껏 마셔보지 못한 술을 대신해서 내가 마시고 별들이 차갑게 쏟아지는 한 겨울밤이라도 길바닥에 길게 누워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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