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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커피포트 하나 / 허세욱

부흐고비 2020. 8. 13. 13:58

스탠포드 캠퍼스에선 후버타워의 종이 시간마다 쟁기질했다. 처음 울릴 때부터 조신스러웠지만 그 여운도 길고 아련했다. 마치 보리밭 긴 긴 이랑 끝으로 사라지는 나른한 뻐꾸기 울음 같았다. 그 종소리가 여섯 번 울리면 배가 고팠다. 그리곤 주섬주섬 책상을 정리하곤 연구실 문을 나섰다. 찰그락 잠기는 소리가 기다란 복도를 흔들었다.

연구실 뒷마당에서 내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고물 자전거는 삐그적거렸다. 캠퍼스 동남쪽엔 작은 구릉이 있었고 그 구릉엔 교수들의 주택이 마을을 이루었다. 종교학 교수의 집 차고 옆에 달린 행랑방을 빌려서 한여름을 나기로 했다. 허름한 목조 건물인데다 동쪽과 남쪽이 빽빽한 정원수라서 짙은 잎 냄새에 꼬리한 곰팡내까지 배여 있었다.

자전거를 몰면서 널찍한 캠퍼스를 가로지를 때 내 코에는 그 곰팡내가 들렸다. 뒷문을 열고 차고를 지나 묵직한 도어를 열면 거기 아늑하게 고여 있는 적막이 좋았다. 나는 그때마다 꼭 들르는 곳이 있었다. 교수 마을 어귀에 있는 슈퍼마켓이었다.

거기서 짠 반찬 한 가지에다 생선 한 토막 아니면 채소 한 개쯤 사는 일이었다. 생선이라면 허옇게 씻어놓은 삼치나 병어 따위의 것, 비리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것 한 토막 잘라서 하얀 랩에 싸고, 채소라면 가지나 애호박 하나 달랑 손에 들었다. 그리고 흔들흔들 자전거를 밟았다.

나의 가재도구란 간단했다. 옛날 쓰던 트렁크 달랑 한 개였다. 그 속에 옷가지 두어 벌에 문필도구, 아내가 싸준 생김 몇 톳에 커피포트 달랑 한 개였다. 당초 자취할 생각은 없었다. 커피 포트는 잠이 오지 않는 밤 커피를 끓이기 위한 세간이었다. 연구실에 밤이 오면 저녁먹으러 패로앨토 시내까지 오고가기에 불편했고, 거기 먼 길을 가 보아야 울긋불긋 냉물 접시에 정내미가 떨어졌다. 별 수 없이 저녁 한 끼는 자취를 하기로 했다.

부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커피 포트를 밥솥 겸 냄비로 썼다. 숙소에 들자 커피 포트에 쌀 한 공기를 씻었다. 손등에 물이 잠길 만큼 물을 부었다. 그리고 전기를 꽂았다. 4,5분이 지나자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들렸다.

나는 커피 포트에 달렸던 거름종이 비슷한 양철 종지에 큼직큼직 애호박을 잘랐다. 뚜껑 사이로 부연 밥물이 피식피식 새어나왔다. 양철 종지를 그 위에 올렸다. 또 3,4 분이 지나자 냄새가 좋았다. 고소한 밥 냄새에 파릇한 호박 냄새가 범벅되었다. 또 한가지 일이 있었다. 벽장에서 김을 서너 장 꺼내곤 그걸 손바닥 절반 크기로 조심조심 찢었다. 아직도 뜸을 들이러 10분은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반시간 부산을 떨다가 드디어 상을 차렸다. 책상 위에 커피 포트를 좌정하곤 양철 종지를 들어 올리자 은빛 쌀밥이 송골송골 키를 세우고 있었다. 호박은 샛노랗게 익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거기다 조금 맛소금을 뿌렸다. 원고지 위로 살포시 김을 내놓고 식초에 절인 물오이 서너 쪽을 호박나물 옆에 곁들였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틀었다.

서울을 떠날 때, 수저와 젓가락을 챙기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스푼과 포크로 대신했다. 까만 김에 하얀 밥을 작은 만두처럼 말아서 퐁당 입 안에 투입할 때 묘한 성취감이 일었다. 거기다 사각사각 호박나물 한입에 시큼한 피클 한쪽을 살짝 밀어 넣으면 신, 산, 함, 고, 감 등 다섯 가지 맛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나는 노릿노릿한 커피 포트의 누룽지를 샅샅이 긁었다. 물도 불도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누룽지가 없는 날은 일단 실패작이었다. 나는 거기에 물 두 컵쯤 넉넉히 부었다.

다시 전기를 꽂았다. 거기서 피리 소리가 울릴 때까지 나에겐 따로 잔 일이 있었다. 양철 종지를 깨끗이 씻고 오이절임은 마개를 꼭 틀었다. 선 채로 숭늉을 마시고 누룽지 한 알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물을 붓고 설거지의 대미를 장식했다. 스위치를 뽑고 커피 포트를 거꾸로 들고 사래질을 치다가 세면대 위에 얌전히 엎어 두었다.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마치고 성찬을 나누고 그 제기를 씻고 닦아 제단을 치우듯 말이다.

이렇게 나의 한 시간을 즐거웠다. 미국에서 살아가는 한국제 5장6부에겐 더없는 친절봉사였고, 해 지고 땅거미 내리는 어스름 저녁이면 둥지로 돌아가고플 때, 그 절절한 귀소의 본능을 달래는 방법이기도 했다.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달랑 커피 포트 한 개가 주방 전부였던 세월이 울컥 그립다. 지금도 언젠가 훌쩍 집을 떠나서 천산산맥 어느 등성이에 책력 없이 숨고 싶다. 그 때 내 행장에 커피 포트 한 개 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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