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해를 물고 간다 / 박양근

부흐고비 2020. 8. 28. 13:19

해가 뜬다. 어제처럼 오늘도 해가 뜬다. 어둠이 사방에서 위세를 부리는 시간에도 해는 산을 넘는다. 새벽안개가 피어오르는 개울을 가뿐하게 건너고 담쟁이가 걸린 돌담을 훌쩍 넘는다. 집 가까이 다다르면 진중하게 마루를 건너 방 문턱으로 다가선다. 마침내 우리 곁으로 바짝 다가선다. 그렇게 하루 진객이 나타나면 태영의 도시에 사는 주민들은 '오늘도 오시는구나'라고 경탄하면서 두 손을 내민다. 나팔꽃이 나팔을 부는 새벽이 그 무렵이다.

그래서 태양은 걷지 않고 달린다. 컴컴한 밤의 제국을 단숨에 무너뜨리듯 동쪽 하늘부터 점령해나간다.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금빛 북을 치는 돌격대를 앞세우고 한 달음질로 밀려온다. 그 앞에서는 삐죽 솟은 포플러나무 그늘도 순식간에 항복하고 닭 무리며 누렁이 무리들도 제 집 앞에 도열한다. 그것은 담장 위에 올라선 수탉이 동쪽을 향해 취타를 울리는 자세를 보면 알 수 있다.

태양은 언제 어디서든 쉬지 않는다. 쉬지 않으므로 그 이름이 태양이다.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잔설이든 빙하든 경외의 허리를 굽힌다. 바람도 충직한 신하가 되어 해의 뒷길만 따를 뿐이다. 그것은 여름이면 매미가 목청을 돋우는 소리로 알 수 있다. 가을이면 살진 메뚜기가 날아 벼 잎 밑으로 기어들어가고 게가 천천히 돌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움직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태양의 수고를 본받아 쉬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친 존재들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내일도 태양이 뜬다는 사실을 무조건 믿는다. 그리고 한없이 반긴다.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 어제처럼 내일도 해는 뜬다. 그 다음의 내일도 마찬가지다. 고대 이집트 시대의 나일강에도, 몽고제국의 초원에도 해는 떴다. 로마의 휴일에도, 잠 못 이루는 시애틀에도 해는 사라지지 않았다. 섬진강 나루터에도 장산 골짜기에도 비슬산 등마루에도 햇살은 다시 비칠 것이다. 게다가 어제 뜬 태양과 내일 틀 태양은 모두 같다. 하늘의 구球다. 광채도 열기도 같다. 그 불편이 태양을 더욱 위대하고 만든다.

만일 태양이 날마다 다르다면 1년의 첫 하루는 무의미할 것이다. 해가 뜬다고 말하지 않고, 달리고 종횡으로 누빈다고도 아니 말할 것이다. 소리없이 오는구나 하고 경탄하지 않고 내일도 우리를 맞이하리라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수탉은 동쪽으로 벼슬을 돌리지 않고, 나팔꽃은 줄기를 타지 않고, 매미는 폭염이 터져라 울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태양은 하나뿐이므로, 태양이 세상을 덮어주고 안아주므로 하루가 의미를 갖는다. 대지와 하늘이 있되 태양이 업다면 어찌 매가 까맣게 치솟으며, 새끼를 거느린 산양이 우직하게 산 바위를 지키려 할 텐다. 통통배조차 거친 파도에서 견뎌 나갈 건다. 무엇보다 내가 한 해의 첫 산길을 생명의 탯줄인양 오를 것인가. 이 모든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태양이 변하지 않는 희망의 붉은 우체통인 까닭이다.

나는 태양을 경배한다. 달맞이꽃이 달을 숭배하듯 365일 내내 그가 있는 하늘을 바라본다. 태양이 하늘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므로, 무엇보다 우주의 장자이므로, 나는 뒤따른다. 내가 쉬는 때이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힌다. 하늘에 태양이 없다면 푸른빛을 희망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둥근 희망, 그 핏빛 자궁이 생명의 길을 낸다.

우리는 잘 안다. 나이를 먹을수록 빨리 삶 저편으로 우리를 보내려 시간이 술수를 부린다는 것을.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우리는 할 일을 찾는다. 태양은 한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므로, 태만한 자를 가장 싫어한다. 그러니 어느 틈에 서쪽에서 하루를 굿바이 하는 태양을 붙잡는 외에 달리 방도가 없다.

해가 지는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일 초라도 더 많이, 일 분이라도 더 오래 빛이 머물기를 부탁하고 싶어서였다. 언젠가 호주에서 태양을 쫓는 어드벤처에 가입하여 그날 두 번 일몰을 보았다. 여긴 한국이니 잠시 국도변 낯선 국밥집에 들러 정월 다섯째 날 노을이 잠긴 국물을 마셨다. 뜨뜻한 첫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태양이 도는 황도를 생각했다. 태양을 삼켰으니 다시 모든 게 흐른다. 발끝까지 피가 돌고 손가락 끝에 힘이 모인다. 양손으로 감싸 쥔 동글나 질그릇이 더없이 따뜻하다. 까닭 없이 눈물이 난다. 한 해를 다시 맞이했는데 그 이상 무슨 자연의 자비를 바랄 건가.

오늘도 아침 해가 당당하게 문턱에 올라선다. 신년 첫 달의 레이스를 위한 테이프를 끊는다. 오늘의 해가 더 둥글게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어서다. 태양의 빛은 다름 아닌 희망의 길이다.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개 넝쿨 / 박시윤  (0) 2020.08.31
구석의 시간 / 최민자  (0) 2020.08.31
시간은 독(毒)이다 / 조헌  (0) 2020.08.28
돌절구 / 손광성  (0) 2020.08.27
풍경소리 / 김이랑  (0) 2020.08.2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