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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간은 독(毒)이다 / 조헌

부흐고비 2020. 8. 28. 13:18

우린 강이 보이는 호젓한 산길에서 우연히 만났다. 이유는 각기 달랐지만 그녀는 강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고 나는 그 비탈길을 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가까운 곳에 작은 찻집이 있어 멋쩍은 마음을 용케 개킬 수 있었다. 여러 날을 망설이며 미적거렸지만 불가항력이었다. 불같이 이는 사랑에 혼신을 다했다.

하지만 모든 걸 거슬러야만 했던 시간들, 늘 숨이 막혔다. 무시로 솟구치는 그리움은 피 맛을 본 야수처럼 감당할 수 없었다. 자꾸 맨발로 뛰쳐나가는 욕망의 가닥들을 하나하나 쑤셔 넣은 채 있는 힘껏 꿰매며 지냈다. 그래 봤자 거개가 헛수고란 것을 알면서 말이다. 자칫 방심하는 순간, 봉합해 놓은 곳이 터지는 낭패를 번번이 겪으면서도 마른 침을 삼키며 다시 부풀어 터지길 기다렸다. 안 된다, 이젠 정말 안 된다고 입술을 깨물수록 마음은 늘 그녀를 향해 달음박질쳤다. 악착같이 옥죌수록 퉁기면 더 멀리 흩어지는 알 수 없는 속내를 어쩌지 못해 쩔쩔맸다.

사랑은 별을 따겠다는 무모함이다. 이미 수억 년 전에 사라져 빛으로만 남은 환상에 집착하는 헛된 몸짓이다. 모든 사랑은 호기심에서 발아되고, 불안감 속에서 웃자란다. 낯선 대상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사랑이란 감정을 불러오고, 그 사랑을 놓칠세라 동동거리는 조바심이 더욱 열렬히 상대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사그라지는 불꽃이다.

만남은 운명이지만 헤어짐은 의지라고 했던가. 5년 넘게 우린 충분히 사랑했다. 그리고 이별을 위해 다시 이 강둑에 마주 섰다.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한 안도감이 서로를 편히 바라볼 수 있게 했다. 두 손을 꼭 잡고 완주(完走)한 마라토너처럼.

사랑에게 시간은 독이다. 익숙함과 편안함은 따뜻한 물에 얼음 풀리듯 사랑을 녹여냈다. 언제부턴가 나는 붙잡고 싶어 그의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놓고 싶을 때를 기다리며 서성댔다. 둘이 만든 절절한 사연보다 만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점점 더 뚜렷해져 갔다. 뜬금없이 세월이 고마웠다. 둘은 그걸 인정했다. 시간은 마음에 굳은살을 만들어 주었다. 이젠 열정과 욕망이 다 빠져나가 바짝 마른 벽돌처럼 속살을 포개도 덤덤하다. 처음 만나 번지듯 온몸에 퍼졌던 떨림은 사라진지 오래다. 간간이 떠올라도 이젠 피식 웃음으로 덮을 수 있다. 사랑은 왜 끝을 보고 난 뒤에야 서로에게 맞는 답을 주는지 생각할수록 절묘하다.

사랑이 두려운 것은 너무 쉽게 상해 미움의 밑거름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미움의 고통보다는 쥐었던 것이 빠져나가는 서운함이 전부다. 충분히 사랑했기에 소모할 그 무엇도 이젠 없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되어 미지근한 난로처럼 이젠 살을 비벼도 상관없다. 델 정도로 뜨거웠던 열정이 기억 속에 가물가물, 아마득하다. 텅 빈 동굴 속처럼 휑하다.

누구에게도 책임은 없다. 이익도 손해도 당연히 없다. 같이 타올랐던 사랑엔 후회 따윈 있을 수 없다. 둘이 찍은 사진 몇 장,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을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기억의 깊은 벽장 속으로 말이다. 그 속엔 또 다른 사랑의 화석들이 너덧 개나 나뒹굴고 있었다.

거센 바람도 일지 않았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처음 만날 때처럼 각기 왔던 길을 되돌아갈 뿐이다. “행복했어. 고마워요. 그럼 안녕!” 돌아선 뒷모습을 자기가 좀 더 오래 지켜봐 줄 수 있다고 우기며 서로 손을 흔들었다. 슬픈 음악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이별은 때를 놓친 이별이다. 아무리 슬픈 이별도 힘겹게 잇는 사랑보단 훨씬 낫다.

한 번도 미워해 보지 않은 채 맞이하는 이별은 마치 저무는 해가 서산으로 사라지듯, 뜨거운 날 졸아드는 웅덩이의 물처럼 아주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허전함이 오히려 달콤한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사랑은 지나가는 것. 온갖 상처와 흔적을 남길지라도 절대 머물지 않는 것. 그냥 그렇게 우뚝한 석탑처럼 오래도록 한자리에 남아 있지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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