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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빈자리 / 강호형

부흐고비 2020. 9. 24. 14:03

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렸다. 드문드문 비어 있던 빈자리가 순식간에 차고도 사람이 넘쳤다. 차가 다시 움직였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승객들은 아쉬워 두리번거렸다. 그중에서도 체구가 왜소한 노파 하나가 유독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키가 작고 깡마른 데다가 허리까지 굽어 더 작아 보였다. 노파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렸다. 손잡이는 너무 높고 옆에도 잡을 것이 없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었다. 노파의 턱밑에도 좌석을 차지한 젊은이가 여럿이니 그건 어디까지나 그쪽 사정이었다. 그러나 노파 쪽에 앉은 사람들은 노파를 일부러 보지 못했다. 신통하게도 그들은 모두 신문을 보고 있거나,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거나, 시선을 불필요한 곳에 두고 있었다. 노파는 더 버틸 수가 없어 차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 안에는 전동차 바퀴 구르는 소리뿐이었다.

이윽고 저쪽 구석에서 문풍지 우는 듯한 인간의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할머니, 이리 오세요.”
노약자석에 앉았던 양복 차림의 노인이 엉거주춤 일어서서 노파에게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더 이상 늙을 여지는 없지만, 강단은 있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주변의 시선들이 일제히 노인과 노파 사이를 오갔다. 곁에 서 있던 사람이 노파를 좌석으로 부축해갔다. 노인은 고맙다는 말이 민망해서 슬며시 노파가 있던 곳으로 피해 갔다.

노인의 턱밑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청년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노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노인은 앉지 않고 노기 띤 눈으로 청년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했다. 청년은 오늘의 운세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앞니 빠진 자리처럼 좌석 하나가 비었는데도 앉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전동차가 멎고 문이 열렸다. 승객들이 경주마처럼 달려들었다. 무리에서 선두를 차지한 중년 아줌마가 순식간에 빈자리에 엉덩이를 디밀었다. 이제 차 안에 빈자리는 없었다. 세상 어디에도 빈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전동차는 쾌속으로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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