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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침묵의 의미 / 맹난자

부흐고비 2020. 9. 26. 21:10

데스크에서 교정을 보는 게 주요 업무인 때가 있었다. 온종일 남의 글만 읽는다. 번쩍 눈에 띄는 것은 드물고 해가 겨워지기 시작할 무렵이면 목덜미가 뻐근해 왔다.

수필의 대부분은 비슷비슷한 일상사요 지나온 삶의 편린들로 시차적인 기록들이었다. 하품을 쫓을 만큼 펄떡거리는 황금 비늘의 대어는 만나기 어렵고 그래도 돋보기를 고쳐 쓰고 읽고 또 읽는다. 그러다보면 마음에 끌리는 소재를 다룬 글과도 만나게 되는데 소재를 설명하느라 예시 부분으로만 그쳐버린 경우에는 안타까웠다. 마치 호젓한 오솔길을 따라나섰는데 별안간 길이 뚝 끊기고 마는 막다른 절벽과 만나는 느낌이었다.

왜 과감히 진일보 하지 못하는가? 글 속에서 왜 생각이 성큼성큼 나아가지 못하는가? 경험의 기록, 체험의 진술에만 그치지 말고 한 발 더 나아가 그 소재가 갖는 의미 천착이나 인생에 대한 필자의 해석 같은 그 작가의 견처見處를 기대하게 되는데 그것들의 대부분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사유의 빈곤일까? 독서량의 부족도 짚어보게 된다. 어차피 문학이란 인간에 대한 물음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떠한 글일지라도 인생과 깊이 관련된 삶의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의 결여는 문학성에서 멀다고밖에 할 수 없다.

고통스러운 우리의 삶, 거기에다 문학은 사유의 둥지를 틀고 근원적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 아닌가.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모순과 이기심. 죄와 구원과 양심의 문제 등 인간에 대한 탐구가 먼저 선행 되지 않고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는 기대하기 어렵다.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나 내게 이상하지 않다.’는 몽테뉴의 말이 아니더라도 인간에게 일어나는 그 어떠한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가슴과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작가에게는 요구된다.

절망과 고통에 처한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 문학이라면 작가는 그 절망을 딛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적 인물과의 해후, 작가의 내면 탐구, 숱한 인생들과의 간접경험은 독서를 통해 보충 될 수 있다. 사유와 독서를 통해 충전되지 않으면 그리하여 스스로 깊어지지 않으면 깊은 글은 쓸 수 없다.

문학은 그 사람의 깊이만큼 쓴다고 한다. 작가의 인간적 가치가 곧바로 작품의 가치로 환산되기 때문에 인생을 바라보는 작가의 안목과 그것을 해석해내는 다른 차원의 눈이 요구된다. 다시 말하면 인생을 바라보는 인간에 대한 안목이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 수필가들의 대부분은 식생활이 그다지 절박하지 않고 비교적 체면 유지가 가능한 편이다. 해서 심각한 갈등이나 깊은 좌절 따위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살다가 혹시 어려운 일을 당할지라도 익혀온 중용의 덕성으로 균형 감각을 잃지 않는다. 온당하며 지극히 상식적이다. 함부로 구겨지지도 망가지지도 않는다. 파격과 일탈을 꿈꾸지 않는다. 건전한 상식, 이러한 담성淡惺만으로는 치열한 창작 행위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자신에게 정직해야 한다. 어차피 완성되지 못한 하나의 인간, 숱한 동물적 욕구와 이상을 동시에 품고 있는 모순적 존재이므로.

문학은 인간 벗기기다. 인간의 껍질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위선과 숱한 욕망, 그 좌절을 꺼내 해체하는 작업, 해체 뒤에는 다시 조립이 가능하다. 상처의 봉합, 문학은 이런 작업을 통해 진흙 구덩이에서 오롯이 피워 올린 한 송이의 연꽃과 같다고나 할까.

고통을 딛고 맑게 피어난 얼굴, 그 순화된 정신과 만나고 싶다. 한데 왜 우리는 정직하지 못한가, 치열하지 못한가? 이러고도 인간을 다루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을까를 깊게 반성해야 하리라.

무엇을 쓸까? 원고 청탁을 물리치지 못하고 마음이 더러 조급해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과감히 침묵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타이른다. 안에서 물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웬만한 평판에 안주하면서 적당한 솜씨로 대충 써낸다면 그것은 뒷날 후회를 불러오게 마련이다. 소외되더라도 침묵하는 편이 낫다.

침묵 속에서 사유의 강폭을 넓혀 나가는 일이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뮈조트 성관에 스스로 소외된 릴케의 그 뼈저린 고독과 침묵에 나는 깊은 감동을 전해 받은 일이 있다. 철저히 고독해지기 위해서 단독자單獨者로서의 그가 선택한 길이었다.

뮈조트 산간 마을에 밤이 내려 만물은 편안히 졸고 있는데 오직 끝없는 극심한 하나의 슬픔이 한 영혼의 고독 속에 깨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영혼의 고독 속에 늘 깨어 있기 위해서 그는 혼자여야 했다. ‘존재하라, 그리고 비존재의 조건을 알라.’고 외친 그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고독 속의 침묵, 침묵의 시간을 많이 가져야 되겠다.

좀 더 외진 마음으로 가난한 영혼이 되어 침묵 속에 깊이 침잠하자고 다짐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나를 구원할 것이다. 비로소 깊은 독서가 가능해지며 오롯한 사유의 세계에 대한 접근이 허락되리라고 믿는다.

뮈조트 성관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 속에 기꺼이 함몰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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