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양반, 웃다 / 강기석

부흐고비 2020. 10. 20. 08:57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도포를 입은 양반이 선비를 만나 통성명을 하려고 마주 엎드려 절을 하는데, 초랭이가 달려와서 엉덩이로 양반의 머리를 깔고 앉는다. 정자관을 쓴 양반의 이마가 흙바닥을 찧는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양반이 사대부의 자손이라고 말하니, 선비는 팔대부의 자손이라고 비꼬고, 양반이 사서삼경을 읽었다고 하니, 선비는 팔서육경을 읽었다며 빈정댄다. 그래도 양반은 웃는다.

웃을 때는 턱이 먼저 덜렁거린다. 콧등 좌우에 붙어있는 밤톨보다 굵은 콧방울에는 움푹 뚫린 콧구멍이 벌름댄다. 눈 아래에서 광대뼈로 이어지는 길고 두툼한 근육이 입꼬리를 당겨서 귀에 건다. 실눈을 감싸고 있던 눈꺼풀이 길게 호를 그리며 내려오다가 볼록한 애교살의 끄트머리를 잡고 관자놀이까지 휘달린다. 미간에서 출발한 검은 눈썹은 둥글게 솟았다가 황급히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끝을 살짝 올려 마무리한다.

양반을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날라리 소리가 방정을 떨고 사물이 요란하게 흥을 돋운다. 터져 나오는 관람객들의 박장대소가 강 건너 부용대를 들었다놨다한다.

양반은 지배계급이었다. 모든 권력은 양반의 손안에 있었다. 그들이 선악, 진위, 그리고 미추의 기준이었다. 양반 아닌 사람은 자신에 의해 선택된 삶보다는 양반의 판단에 의해 결정된 삶을 더 많이 살아야만 했다. 양반은 존경의 대상이면서도 마주 보기조차 두려운 존재였다.

감히 양반을 희롱하다니! 그것도 양반 마을에서…. 그런데도 양반은 웃는다. 뿐만 아니라 마을에 사는 양반의 후손들조차 같이 보며 웃는다. 그들은 놀이판을 제지하지도 않고, 놀이꾼을 타박하지도 않는다.

비굴한가? 양반도 놀림을 받으면 화가 난다. 그러나 양반의 인격은 양반다워야 한다. 도량이 크고 넓어서 양반 아닌 사람이 놀려도 그러려니 해야 한다.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양반의 체면을 살리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웃어야 한다. 아니다.

거드름인가? 양반의 배짱은 오만과 자만으로 두둑하다. 우월한 유전자를 자랑하며 양반 아닌 사람을 깔보고 잘난 체 한다. 그까짓 양반 아닌 사람이 하는 소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욕을 하거나 말거나, 놀리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웃는다. 아니다.

엉큼한가? 양반은 양반이 아닌 사람을 더 잘 부려먹고 더 많이 수탈하려고 야누스가 된다. 호탕한 웃음 속에 비정함을 숨기고, 어리석음 속에 간악함을 감춘다. 겉은 무량 호인이면서 속으로는 이익을 챙긴다. 이런 속셈이 스스로 만족스러워 웃음이 난다. 아니다.

걸쭉한 해학과 풍자가 끝나고 할미, 부네, 초랭이, 백정, 선비, 그리고 양반이 춤판을 벌인다. 무리를 지어서 춤을 추다가 한 줄로 마당을 돌면서 춤을 춘다. 맺고 어르고 푼다. 흥에 겨워 어깨가 올라가고, 신명이 돋아 발뒤꿈치가 가볍다. ‘삘리리이, 덩덩덕쿵덕, 삘리리이, 덩덩덕쿵덕’춤이 춤을 추고, 춤으로서 춤을 춘다.

내어줌이다. 양반의 삶은 양반 아닌 사람들에 의해서 유지된다. 양반 아닌 사람의 피와 땀이 없다면 양반은 존재할 수 없다. 양반은 양반 아닌 사람들의 고단한 운명을 직시하고 그들의 삶을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양반이 된다. 양반의 자리는 양반 아닌 사람들을 보듬어 주고 위로해야 하는 자리이다. 양반은 잠시나마 양반 아닌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어 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고 그들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어준다. 이를 통하여 양반은 오히려 놀림을 당하는 쾌감, 바보가 되는 쾌락을 맛본다. 양반의 여유이고, 배려이고, 그리고 사랑이다. 그래서 양반은 웃는다.

벗어남이다. 인간은 몸으로 존재한다. 몸은 감성이다. 감성은 이성보다 우월하다. 이성은 감성의 도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뇌 속의 환영에 불과할 수 있는 초감성적인 형이상학이 감성적인 것보다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의 몸 위에 군림했다. 인간은 정신 혹은 영혼을 중시하면서 몸을 억압해왔다. 몸의 감성은 언제나 부정되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양반이 숭상했던 유학은 특히 몸의 원초적 욕망을 경계했다. 그것은 몸의 마술적인 힘에 대한 저항이었다. 그렇다고 몸의 욕망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억압되고 은폐되어 있을 뿐, 기회가 닿으면 언제라도 제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양반은 유희 한가운데서 자신을 구속해온 이념의 굴레를 벗고 몸의 욕망에 충실함으로써 드디어 인간 본래의 기쁨을 맛본다. 그래서 양반은 웃는다.

어우러짐이다. 예(禮)로서 상하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수직적 질서가 음악에 의해 수평적 조화로 바뀌고, 몸짓과 몸짓을 주고받으면서 일상을 초월하여 새로운 세계를 연다. 반상의 경계가 무너지고, 남녀노소의 차별이 부서지고, 너와 나의 벽이 허물어지고, 그리고 내 안의 나와 내 밖의 내가 소통한다. 소외와 구별이 사라진 세계에서 차이는 생성과 변화를 위한 힘이 된다. 양반은 양반을 내려놓고 서로 다름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희열에 몰입한다. 그래서 양반은 웃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놀이패 꼬리에 따라붙는다. 양반처럼 웃으면서 양반처럼 춤을 춘다. 양반이 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세상에는 양반이 아닌 사람이 없다. 모두가 양반이므로 모두가 신나게 웃는다. 안동 하회별신굿탈놀이 덕분에 참 즐겁다.

 

 

당 선 소 감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등장하는 양반탈은 웃는 모습이다. 놀림을 받으면서도 웃는 까닭이 궁금했다. 웃는 양반탈을 만든 허도령의 마음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허도령은 허도령이 살았던 시대의 환경과 사유방식으로 양반탈을 만들었으므로 그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허도령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낼 수 없다. 허도령이 실제 인물이 아니므로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시점을 옮겨 현대의 미학과 예술철학의 관점에서 양반탈이 웃는 까닭을 나름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결과적으로 역부족이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제시한 양반탈이 웃는 까닭은 하나의 문학적 제안으로 만족해야할 것 같다. 이 후에 많은 사람들이 좀 더 깊은 안목으로 양반탈의 웃는 의미를 즐겼으면 좋겠다.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 덕분에 경북문화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아져서 많은 내외국인이 경북을 방문해주길 기대한다.
△2005 수필세계 신인상 △2011 수필집 ‘초인연습’ 발간 △2016 경북문화체험전국수필대전 은상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까운 숲이 신성하다 / 김훈  (0) 2020.10.20
천상병이라는 풍경 / 김훈  (0) 2020.10.20
여자의 풍경, 시간의 풍경 / 김훈  (0) 2020.10.19
가을 바람소리 / 김훈  (0) 2020.10.19
백산가에 뜬달 / 정양자  (0) 2020.10.19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