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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빈 배에 가득한 달빛 / 맹난자

by 부흐고비 2020. 10. 29.

우리 집 작은 방 벽면에 수묵화 한 점이 걸려있다. 사방이 겨우 한 뼘 남짓한 소품인데 제목은 <귀우도歸雨圖>이다. 조선조 중기 이정李禎이란 사람이 그린 그림의 영인본이다.

오른쪽 앞면에는 수초水草가 물살 위에 떠 있고 어깨에 도롱이를 두른 노인이 막대를 비스름하게 쥐고 있다. 간단하면서 격조格調높은 그림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는 흐르는 강물과 그 위에 배 한 척이면 그것이 실경實景​이 되었건 그림이 되었건 간에 무조건 좋아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 한국 문화재보호협회에서 보내준 안내문을 보게 되자 곧바로 달려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잔잔히 흐르는 물살, 그 위로 떠가는 시간.

그러한 강물과 마주하게 되면 이내 서사정 '逝斯亭' 이 떠오르고 그 다음으로는 '가는 자 이와 같은가' 했다는 공자의 그 말이 생각나곤 했다. 나 또한 발길이 막히면 강가에 나가 '가는 자 이와 같은가'를 되뇌어 보기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강물은 참으로 유정有情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숨죽인 강물의 울음소리가 내 안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얼큰하게 술이 오르면 아버지께서 자주 부르시곤 했던 노래,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젖은 목소리.

'이즈러진 조각달, 가앙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이런 강물마저 실린다면 가을 풍경으로서는 나무랄 데가 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러고 보면 강물과 배와 달빛은 내게 우연히 각인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이던가. 어머니의 옷가지를 태우고 돌아온 날 밤, 동생들 모르게 실컷 울어보려고 광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도 달빛은 쏟아져 들어왔다.

그때 달빛만 있으면 어디에서건 세상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슬프면서도 왜인지 그다지 서럽지가 않았다. 흰 눈이 더러운 흙을 감싸듯, 달빛은 지상地上의 것들을 순화시키는 따스한 손길을 갖고 있는 듯 싶었다.

달빛은 감성感性 밝기를, 그 명암의 농도를 조종하는 장치를 갖고 있는 듯했다. 16년 쯤 되나 보다. 교단에서 두보杜甫 시詩를 가르칠 때였다. 마침 가을이어서 <추홍​秋興> 여덟 시 가운데서 나는 첫 번째의 시를 골랐다.

또 국화는 피어 다시 눈물 지우고
배는 매인채라
언제 고향에 돌아가랴.

고향으로 떠나지 못하고 있는 한 척의 작은 배, 그 '고주일계孤舟一繫'는 두보 자신일 것이다. 55세 때의 작품이라고 한다. 그는 오랜 표랑漂浪 끝에 무산巫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벌써 폐병과 소갈증으로 신병身病이 깊은 후였다. 고향으로 가는 도중 배 안에서 죽으니 나이 쉰아홉.

이 시詩가 그대로 내 가슴속에 들어와 어쩌면 내가 그 실경實景속의 주인공이나 된 듯하였다. 아니 내 경험 속에도 이와 같은 장면은 들어 있었다. 서울이 집인데도 명절날 집에 가지못하고 자취방에서 멍하니 혼자 앉아 있을 때, 그때도 만월滿月은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

빈 방, 그리고 달빛 알 수 없는 무엇인가 그 때 가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누르기 어려운 충일充溢. 아, 어떻게 하면 말로 다 풀어낼 수 있을까. 빈 배와 달빛과 그 허기를, 그래서 아마 그 때부터 달빛은 나의 원형原形이 되었고, 빈 배는 나의 실존을 뜻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저 수묵화 속에서 노옹老翁을 빼버리고 아예 빈배로 놔두고 싶었다. 그 위에 달빛만 가득하면 거기에 무얼 더 보태랴.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때 나는 버리는 것부터 배웠다. 그 때문인지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간다는 토끼처럼 도중에 아예 목적을 버리고 마는 버릇, 투망投網을 하러 왔다가 또 '어획' 그 자체를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돌아오는 배에는 달빛이 가득하거니, 달빛만 가득하면 그것으로 좋았다. 무형無形의 달빛은 내게 있어 충분히 의미 있는 그 이상의 무엇이 되었으며 언제인가부터 나도 제 혼자서 차오르는 달처럼 내 안에서 만월을 이룩하고 싶었다.

​저 무욕대비 無欲大悲의 만월 滿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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