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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에로티시즘의 낮과 밤 / 구활

부흐고비 2020. 10. 30. 11:35

낮에 느끼는 애로티시즘은 시각적이고 밤에 느끼는 그것은 다분히 촉각적이다. 맞는 말이다. 낮에는 보이는 눈이 먼저 작전을 꾸미고, 밤에는 느끼는 손과 몸이 임무를 수행한다. 마태복음 5장 28절에 있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는 구절도 눈을 경계하는 낮의 말씀이지 밤의 에로스를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성경을 읽을 때 이 구절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온갖 상념에 빠져들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어 29절에는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 오른 손이 그러거든 찍어 내버리라." 고 경고하고 있다. 하루에도 여러 번씩 마음속으로 간음을 하거늘 '빼어 버리고 찍어 내버리라'했으니 어떡하면 좋아요.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독생자 우리 주 예수님!

만일 성경이 가르친 대로 실천을 했더라면 눈과 손을 제대로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낮의 애로티시즘에 시각적으로 미숙한 장님과 부모의 피임약 잘못 사용으로 손발 없이 태어난 기형아들이나 제대로 대접을 받았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여러 해 전부터 풍류에 천착해 오면서 그 근간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보았다. 결국 풍류는 시와 술 그리고 색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선비들 중에서 설익은 풍류객들은 술에 빠져 학문적 일가를 이루지 못했거나 여자에 취해 패가망신한 경우가 허다했다. 그랬던 선비들은 제대로 된 시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거나 살긴 명대로 살아도 제값을 하지 못했다.

어우야담이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퇴계와 남명은 동년배로 생전에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우스개 삼아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불러 앉혀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퇴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술과 색은 남자가 좋아하는 것이지요. 술은 그나마 참기가 쉽지만 여색은 참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지요. 송나라 시인 강절은 '여색은 사람에게 능히 즐거움을 느끼게 하네.' 라고 했는데 여색은 그처럼 참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색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요."

남명이 "나는 이미 전쟁터에서 진 장수나 다름없습니다. 묻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하였다. 퇴계는 "젊었을 때는 참고자 해도 참기가 어려웠는데 중년 이후로는 꽤 참을 수가 있었으니 의지력이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구봉 송익필이 그가 지은 시 한 편을 읽어주었다.

"옥 술잔에 아름다운 술은 전혀 그림자가 없지만/ 눈 같은 뺨에 엷은 노을은 살짝 흔적을 남기네./ 그림자가 없거나 흔적을 남기거나 모두 즐기는 것이지만/ 즐거움을 경계할 줄 알아서 주색에 은혜를 남기지 마라."

남명이 "구봉의 시는 패장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로군요." 라고 말하자 모두 웃었다.

성경은 섹스어필이란 낱말이 만들어지기 전에 씌어진 경전이다. 그렇지만 너무 가혹하다.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밭다리 후리기를 해서라도 넘어뜨려 보고 싶은 음심이 동하기 마련인데 '음욕을 품은 눈'을 빼버리라고 했으니 해도해도 너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 참여 연대'라도 만들어 이미 눈과 팔을 잃은 사람들과 함께 천당 가는 길목인 화장터 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라도 했으면 싶다.

섹스어필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마주 섰을 때부터 있어 온 원초적 욕구이자 생식의 전 단계다. 이성을 가슴에 품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자손 번영은 기대할 수 없다. 이 세상을 성경이 가르치는대로 음심으로 오염되지 않는 곳으로 만들려면 애초에 에덴동산에서 아담의 갈비뼈를 뽑아내지 않았어야 옳았다. 이건 순전히 하나님의 계산착오임이 분명하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원양어선 선원이 "상부터 볼까요, 자리부터 볼까요." 란 아내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시는 분들은 이 글속에 이의제기에 은근히 동조하리라 믿는다. 예부터 밥보다 더 좋은 게 여색이며 숟가락 들 힘만 있어도 여자를 탐하는 게 남자의 생리구조라고 한다. 그러니 아무리 패전 장수라 하더라도 전황이 급박해지면 녹슨 칼을 다시 차고 나설지 누가 알겠는가.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욕은 불과 같고 여색은 섶과 같다. 불이 장차 치성하려 하는데 색을 만나면 반드시 타오른다. 게다가 술이 열을 도와주니 그 힘을 어찌 누늘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세 선비들은 '불도 불 나름, 섶도 섶 나름'이라며 점잔을 빼고 앉아 있었지만 속마음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지.

내가 만일 그 시대에 태어나 선비들의 자리에 끼일 수 있었다면 술상 한 번 근사하게 차려내며 멋진 시 한 편을 낭송했을 텐데. 나는 늦은 출생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고/ 서글픈 옛 자취인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의 시 '설야'의 일부)

풍류의 '시주색詩酒色색주시'나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이나 모두 그 게 그거네. 시詩가 여인色이 되고 색이 다시 말씀詩이 되듯 색色이 공空이되고 텅빔空이 꽉참色이 되는 이 난해하고도 거룩한 원리! 하나님, 우리 모두의 눈과 팔을 거두어 가세요. 마하바라밀다심을 외우다 비비디 바비디 부우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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