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읽기

규곤시의 방 / 양태순

by 부흐고비 2020. 11. 4.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

영양 두들 마을에 갔다. 입구에서 보면 앞집 뒤로 뒷집의 지붕이 보이는 지형이다. 골목을 훑고 가는 바람이 가만가만 지나간다. 담장 안은 소란한 것을 멀리한다는 듯 고요가 내려앉은 처마가 푸르게 살아있다. 저절로 발소리를 죽이고 매무시를 단정히 하였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 해설사를 만났다. 그는 장계향이 반가의 여인으로 시가와 친정을 일으킨 서사, 시·서·화에 빼어난 실력, 자녀 교육에 있어 학식보다 착한 행동의 실천을, 어려운 사람을 돕는데 아낌없는 지원을 한 군자라고 열변을 토했다. 한 가지를 잘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다방면에 출중한 능력을 갖췄다니 뛰어난 사람임이 분명했다. 유교적 환경이 선한 영향을 주었겠지만 스스로 노력하고 수양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까. 여중군자 장계향의 삶을 들여다본 시간이었다.

이어진 전시실에는 여러 가지 음식을 모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다양한 재료로 색과 모양을 내어 정갈한 기품이 있다. 동아누르미, 앵두편법, 빈자법 등 나에게는 이름조차 낯선 것들이 많다. 영양은 내륙 깊숙이 있는 지역인데 해산물과 생선에 대한 요리와 저장법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 시절 양반가에서는 언제나 손님을 맞이하고 접대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구나 싶었다. 요리 체험을 하고 싶었는데 예약을 안 해서 체험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석류탕’에 끌려서 어떻게 만드는지 궁금해 그 앞에 한참을 머물렀다.

집에 와서 얻어온 음식디미방 책을 펼쳤다. 한글로 적은 책이라는데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부족한 고어 실력으로 띄엄띄엄 읽다가 물리기를 반복했다. 내가 관심 있었던 ‘석류탕’이라도 제대로 알아보자 마음먹고 다시 펼쳤다. 처음 나오는 생치부터 막혔다. 생치가 무엇인지 찾아보는데 몇십 분이 걸려 꿩고기라는 것을 알았다. 다음을 읽으려니 또 막혀서 문맥상 맞춰보고 네이버 검색하느라 한두 줄 읽기가 힘겹다. 기름지렁, 진가루, 노외다, 백자…. 찾을 것이 많아서 한나절은 족히 걸려 겨우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대강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다. 꿩고기나 닭고기, 두부, 버섯, 잣, 채소를 다지고 양념하여 볶고 밀병전을 만들어 다져놓은 속을 넣어 석류 모양으로 빚는다. 끝 문장에는 한 그릇에 서너 낱씩 넣어 술안주로 쓰라고 되어 있다.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났다. 다소곳이 앉아 부끄럼타는 소녀 같아서 나를 홀린 ‘석류탕’이 술안주라니 말이다. 해독에 들인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350년 전엔 술맛이 종갓집의 평판에 일정부분을 담당하였으니 술안주인들 소홀히 할 수 있었을까. 정성을 들여 빚은 술과 고운 자태로 눈을 즐겁게 한 술안주로 차린 상은 손님들에게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믿게 했으리라. 손님들은 돌아가서 그 가문이 반듯한 가문이라 소문을 내는데 입을 보탰다고 생각된다.

부녀자들이 알아야 할 살림법이란 제목이 썩 어울리는 책이다. 알뜰살뜰 아끼고 부지런을 떠는 것은 좋은 일이다. 거기에 음식으로 가문의 이름이 빛나게 솜씨를 보탠다면 더욱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난 집은 인심이 후하다. 또한 예의를 중하게 여기고 사람을 귀히 대한다. 한 집안이 대를 이어가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에 안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음식만 한 것이 없지 싶다.

어머니는 음식 잘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종갓집이 아닌데도 일가 친척들은 무시로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때로는 몇 달씩 기거하는 사람도 있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으로 때마다 상에 올릴 찬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흠 잡히지 않은 상차림을 하려고 머리를 짜냈다. 생선은 꾸덕하게 말려 놓았다가 쓰고, 각종 채소는 볶고 찌고 무쳐서 찬을 만들었다. 봄에 뜯은 나물도 한 자리를 차지했다.

일 년에 한 번은 마을 어른들을 대접하였다. 그날은 할아버지 생신이다. 며칠 전부터 막걸리 빚고, 메밀묵과 두부 만들고, 식해 만드느라 손을 재게 움직였다. 마침 12월이라 빠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치마에 불이 붙은 듯 종종거리느라 정작 본인은 밥 먹는 것도 잊었다. 맛있게 먹은 사람들은 다음날 음식 칭찬 수다방을 열었다.

나는 어머니와 달리 음식 만드는 데 애정이 없었다. 그저 한 끼 때우는데 급급한 수준이다. 젊어서는 영양제 같은 알약으로 끼니가 해결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무얼 먹을지 고민하는 것이 스트레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솜씨가 없는 엄마 만나서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지금은 어머니의 음식을 배워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음식은 단순히 먹는 것을 넘어선 가난한 마음에게 위로를 전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잘 만들었던 콩을 갈아서 만든 강정, 정과, 막걸리, 조청, 호박버무리가 그립다. 특히 메밀묵 쑤는 법을 배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어머니는 이미 강을 건너 나의 부름을 듣지 못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음식 유산을 물려주고 싶다. 내가 없을 때 떠올리기만 해도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딱 한 가지면 족한데 나에게는 없다. 요리 프로그램을 기웃거리지만 무릎을 칠 만한 것이 없다. 아이들이 살면서 혓바닥을 감싸는 그리움 한 사발로 배를 든든히 채워 거뜬히 일어설 수 있는 음식이. 자꾸만 엄마의 손맛이 삼삼하다. 규곤시의방에서 그럴듯한 힌트를 얻을 수 있도록 열독해야겠다.

 

 

당 선 소 감


창 너머로 보이는 가을 하늘이 맑아서 삽상하다. 부지런한 계절이 내 마음과 달리 피고 지는 과정들이 무심해서, 장마와 태풍의 시련에도 굳건해서 생각의 올이 자꾸만 얽힌다. 빗질로 다듬으려 할수록 더 엉키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책을 집어 들었다. ‘빨강머리 앤’이다. 장을 넘길 때마다 앤의 매력에 빠졌던 오래 전의 감정이 다시 살아났다. 앤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따라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정신없이 걸을 때 당선 소식이 날아들었다.
심사위원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비어진 여백에 묵힌 마음을 길어 내어 나만의 방법으로 쓰기 위해 정진할 것이다. 시냇물과 강물이 언젠가 만나기 마련이듯 새로 만난 앤으로 인해 기분 좋은 통증이 시작된다.
△포항소재문학상 우수상 수상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생충, 찔레꽃을 불러오다/ 송혜영  (0) 2020.11.09
구멍 / 엄옥례  (0) 2020.11.09
도다리 쑥국 / 김은주  (0) 2020.11.03
고목(古木) / 윤오영  (0) 2020.11.03
헛제삿밥 / 안연미  (0) 2020.11.03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