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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 대추차 한 잔을 아끼듯 마신다. 약간의 한과(漢菓)를 곁들인 차 한 잔에 팔천 원이다. 서민들이 마시기에는 좀 비싼 값이지만 따뜻한 차를 마시자 꽁꽁 얼었던 몸이 서서히 녹는다.  적막한 방에서 홀로 마시려니 괜스레 눈물이 나려고 한다. 그리운 이성 친구와 함께 오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허전하다. 그가 몹시도 보고 싶다.

차를 마시며 조그만 뙤창문을 통해 바깥의 풍경을 내다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와를 얹은 돌담이다. 돌담을 따라서 여러 가지 상록수와 낙엽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처마 끝에는 풍경(風磬)이 겨울바람에 ‘땡그랑 그랑’ 소리를 풀어낸다.

우물이 있는 수연산방의 마당에는 주인장이 벌써 크리스마스트리와 클래식한 의자를 장식해 놓았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다소 낯설고 색다른 느낌을 준다. 내부는 전통적인 소품들로 단아하고 청결하게 잘 꾸며져 있어 아늑하다.

성북동에 위치한 수연산방은 ‘전통한옥찻집 1호’ 이다. 바로 이곳이 탁월한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던 상허 이태준 소설가의 고택이다. 잘 보존된 고택을 둘러보면서 허물어지고 없는 나의 생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

회색빛 땅거미가 젖어들고 있다. 남은 차를 마저 마시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에는 오래된 사철나무 옆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李泰俊문학의産室’ 이라고 적힌 기념비 옆에서 추억의 사진을 남긴다. 기념비에는 이렇게 설명이 적혀 있다. ‘이 집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난 尙虛 이태준이 1930년대부터 살면서 글을 쓰던 聞香樓이다. 근대 순수문학의 기수인 그는 「달밤」「돌다리」등 주옥같은 단편집과 여러 장편 외에 수필집 「無序錄」명저 「文章講話」를 남겼다.’

내가 이렇게 추운 겨울에 비싼 KTX 요금을 지불하며 구태여 이곳을 찾아온 연유가 있다. 지난 11월 14일, 프린스호텔에서 대구수필가협회의 연간집『대구의 수필』제4호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사무국장으로부터 낭송을 해달라는 부탁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하여 제1부 행사에서 나는 문우 K씨와 함께 이태준 선생의 수필「이성간 우정」을 윤송하였다. 소설가 이태준 선생이 쓴 수필을 낭송한 후에 그가 살았던 고택을 직접 보고 싶은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쳤다. 이곳에서 그의 천재적인 문향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솔직히 이태준 선생의 작품을 낭송하기 전에는 그의 작품세계를 잘 모르고 있었다.

기실 11월 2일에 강원도 철원 대마리 평화박물관 앞에서 ‘제5회 상허 이태준 추모 문학제’가 있었다. 나는 그 행사에 참석하여 詩를 낭송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삶에는 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긴다. 갑작스럽게도 나는 몸살이 심한 탓에 부득이 불참한다는 통보를 하였고, 하루 종일 아쉬운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하였다.

여하튼 작가 이태준 선생에 대하여 깊이 알고 싶었고, 그의 수필을 느끼고 싶어 수필집을 한 권 구입하였다. 흥미를 갖고 지금 그의 수필을 읽고 있다. 그의 작품 「파초」를 기억하며 수연산방에서 파초를 찾았으나 흔적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특히 그는 수필 「이성간 우정」에서 이성간의 우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부작용이 많은 이성끼리의 우정을 건축하는 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라는 것을 설파(說破)했다. 가슴을 울리는 메시지에 나는 진실로 공감한다.

반세기 전의 글이지만 그의 글은 전혀 낯설지가 않다. 언어의 담백한 속살로 읽는 맛을 더한다. 세월이 흘러도 풍성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처럼 맑고 서늘한 물질 그 이상이다. 사실상으로 나에게도 친숙한 이성 친구가 많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그리고 문단의 벗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실화를 해서 화재를 당할 정도로 매력적이고 채색적인 이성 친구는 흔하지 않다. 다만, 내 마음 속에 연정을 느끼고 석탄화 작용을 하는 친구가 두어 명 있다.

이태준 선생은 ‘남자끼리 십 년의 정보다 이성끼리 일 년의 정이 더 도수를 올리는 것은 석탄화 작용이다.’ 고 했다. 그 친구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 중에서도 나는 30년 지기로 지내온 친구가 있어 삶이 심심하지 않다. 가슴에 기쁨의 강이 푸르게 흐른다. 서울 하늘이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오히려 유정하며 푸근하다. 오래된 포도주 같은 이성 친구와의 많은 추억들이 풍경(風磬)소리와 함께 소낙비처럼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전통다원의 은은한 불빛 아래서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은, 오늘따라 대담하게 연애의 최단거리를 달리고 싶을 만큼 情의 도수를 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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