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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만도 못하다는 것과 짐승보다 더하다는 것 중 어느 게 더 심한 욕일까?”

인터넷 우스개란에 올라와 있는 말이다. 그 재치 있는 말놀음에 한참 웃고 나니 그와 관련 있는 우스개가 하나 떠올랐다.

어떤 남녀가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어 여인숙에 들었다. 공교롭게도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한방을 쓰게 되었다. 잠자기 전, 방 가운데 줄을 걸고 커튼을 친 여자가 말했다. “당신, 이쪽으로 넘어오면 짐승이에요.”

아무 일 없이 밤이 새고 날이 밝았다. 줄을 걷으면 여자가 또 한 번 말했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

그날 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면 그 남자는 짐승보다 더하다는 말을 들었을까?

그런데 같은 말이 그 말을 쓰는 순간의 화자의 심정에 따라 정반대의 가치로 새겨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여자는 처음에 남자가 수컷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면 짐승으로 여기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그 본능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음을 비웃는다. 그러니 남자란 여자들의 내숭 뒤에 숨겨진 희미를 잘 파악해서 때에 따라 본능의 움직임에 충실해야 짐승보다 못하다는 수모를 면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짐승이란 말은 ‘몸에 털이 나고 네발을 가진 동물’로 사전에 나와 있다. 두 번째 뜻은 거칠고 야만스런 사람을 일컫는다. 여자가 말한 것은 나중의 뜻이다. 나는 이 낱말이 언제부터 사람에 대한 비유로 쓰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어란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짓는 가장 문명적인 표징의 하나이니, 곧 삼라만상을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사고로 재단한 뒤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짐승의 특성을 야만스럽다고 했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오히려 인간이 충동적으로 저지르는 행동보다 절제된 것일 수도 있다.

앞에서 든 우스개를 뒤집어 말해 보자. 암수 한 쌍의 짐승이 한 우리에 있다. 그러나 동물은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교미를 하는지라 그런 밤,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아무 일 없다. 만에 하나 오로지 쾌락만을 위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짐승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사람 같은 놈이란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결국 우스개에 쓰인 짐승 같다는 말은 따지고 보면 사람의 경우에나 해당될 뿐이라는 이야기다. 위선을 모르는 동물의 눈으로 볼 때는, 저의 타고난 왕성한 생명력을 윤리와 관습이라는 줄로 얽어매어야지만 모듬살이를 지탱할 수 있는 나약하고 불쌍한 존재가 곧 인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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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집이나 겪는 일일 테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집안에는 온갖 작은 동물을 키우게 된다. 아이들은 그것을 기르면서 정을 들이는 법도 알게 되고, 죽음이라거나 이별이라거나 하는 낯선 낱말에도 익숙해진다. 우리집에는 병아리니 햄스터니 열대어니 하는 자잘한 동물들을 거쳐 지금은 어른 손바닥만 하게 자란 청거북 한 마리가 열대어 어항을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은 나가고 없는 시간에 먹이를 주면서 나는 그놈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눈을 맞추기도 한다. 그때 그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노라면(아시겠지만 거북은 다소 징그러운 줄무늬에 비해 낙은 눈이 맑고 예쁘다. 그 윤기!) 그놈 역시 나를 그렇게 빤히 올려다보면서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그 눈으로 볼 때 우리 인간들은 희한하게도 생겼으리라. 눈 위에 붙은 필요 없는 털, 쓸데없이 솟은 코(거북이는 콧구멍만 뚜렷하다), 고기를 낚아채기에는 너무 연해 보이는 입술…. 나아가 어항 속을 헤엄쳐 다니면서 나를 볼 때는, 내가 공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보이리라는 데까지 생각은 비약한다. 우리 가족이 우리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생활 공간은 거북이로서는 제 집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 대지는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기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우리가 그들을 관찰하듯, 인간을 관찰하는 눈 또한 어찌 없다고 할 것인가.

그런데 동물이 사람을 볼 때는, 사람이 동물을 보는 만큼 이질적으로 보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해 여름에 나는 오리건에서 넉 달 간 삼림 감시원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늘 혼자였고 거의 벌거벗다시피 했습니다. 주위에는 전혀 인적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삼림 깊숙한 곳에 있었어요. 그 여름이 끝날 무렵 내 피부는 아주 보기 좋게 그을었고 내 마음은 무척이나 차분하게 가라앉았습니다. 8월 말경, 하루는 내가 산딸기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 곳에 쭈그리고 앉아 산딸기를 따먹고 있는데 갑자기 혀 같은 것이 내 어깨를 핥는 거예요.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보니까 사슴 한 마리가 내 잔등에 흐르는 땀을 핥아먹고 있는게 아니겠어요! 나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사슴은 내 앞으로 돌아와 산딸기를 따먹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한동안 조용히 산딸기를 따먹었어요. 나는 무척인 감동했습니다. 동물이 나를 그처럼 믿어주다니!

나는 이 ‘우리는’이라는 낱말을 읽었을 때, 인간의 언어가 동물의 세계에서도 통용될 듯한 묘한 충격을 받았다. 사슴이야말로 ‘우리는 함께 산딸기를 따먹었다’라고 말할 법한 상황이지 않은가.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와 잔등에 솟아난 담, 앞발로 산딸기를 따먹고 있는 인간이란 사슴의 눈에는 그저 한 마리 짐승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대자연 속에서 그 삼림 감시원은 짐승과 동격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참으로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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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목가적인 장면이 아니어서 죄송하지만 나도 한 번, 내가 짐승처럼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출산 때였다.

산달, 진통이 시작된다. 허겁지겁 차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도착하마자 옷을 모조리 벗기우고, 병원 이름이 줄줄이 새겨진 푸른 환자복이 걸쳐진다. 터질 듯이 솟아오른 배 아래로 가운 앞자락이 벌어지려 한다. 한 손으로는 배를 감싸안고, 한 손으로는 옷자락을 여미며 힘들게 분만실로 들어선다. 그리고는 진료대에 눕혀져 분만을 위한 처치가 시작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옷보다 더한 무엇이 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벌거벗은 짐슴. 옷으로 상징되는 모든 인간적 체면과 품위를 다 벗은 다음, ‘도살장’과도 같은 그 과정에 이르니 내가 다만 ‘새끼’를 낳으려는 암컷, 한 마리의 짐승에 지나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출산 지옥의 초입, 이성의 통제아래 있을 때의 ‘생각’이다. 그 다음 과정은 영화나 소설을 통해 익숙한 장면들이다.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뒹굴고 울부짖고….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 바 없다. 한 여류 소설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다가 해를 울컥 낳듯, 그 좁은 가랑이 사이에 둥근 머리가 불쑥 솟구쳐 나올”때까지 살이 찢기는 고통은 그치지 않는다. 그토록 붉고 그렇게도 둥근‘ 핏덩이가 내 몸 속에서 빠져 나갈 때까지는.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여성은 출산을 겪으면서 자신이 결국 한 마리 짐승이라는 뚜렷한 인식을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묘한 일은 젖을 물리거나 아이를 보듬거나 하는 여성으로서의 거의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육아의 과정을 겪으면서 조금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첫아이를 낳고 얼만가 지나서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에서 얼룩말이 새끼를 낳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 화면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에, 암컷으로 태어난 것들의 운명은 그토록 끔찍한 것이었다. 그 짐승은 선 채로 비척대며 그 과정을 견뎌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부짖지도 않고, 고통스런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사람보다 나았다. 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일에 있어 인간과 짐승이 같은 과정을 겪는 만큼, 짐승들의 모성애 역시 인간과 다를 바 없을 터이고, 그렇다면 짐승에게도 새끼를 낳는 것은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만큼이나 숭고한 일이다. 인간이 그 같은 과정을 똑같이 치른다고 해서 치욕스럽게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날 나는 그런 자각에 이르렀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둘째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흉을 공연히 죄 없는 짐승에게 빗대곤 한다. 그러나 짐승같다는 말을 함부로 비하해서 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인간의 자아의식을 가슴께까지 끌어내려 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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