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수필 읽기

시골 뒤뜰 의자 / 유한근

부흐고비 2020. 12. 21. 08:47

그는 분명 몽상주의자다. 가당치 않은 카페를 꿈꾼다. 카페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아직도 추위가 물러가지 않은 시골 뒤뜰에서 그는. 그곳은 그의 유년의 기억들이 있고, 햇빛바라기를 하는 퉁가리 생쥐들이 고물거리고 있고, 염소 새끼들의 슬픈 주검이 있고, 태에 싸인 송아지의 탄생 울음이 있다. 그런 유년의 기억 공간에서 그는 카페를 꿈꾼다. 그 판타지를 그린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유년과 소년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그때는 한 집에서 스무 명이나 넘는 대식구가 살았고, 대문 밖에서는 오일장에 몰려온 장돌뱅이와 난장판꾼, 장 보러 마실 나온 사람들도 분주하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장마당이 텅 비어 있고 그 혼자만 뒤뜰에 서 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을 바라다보고 있다. 집 밖은 죽어 있고 마을은 적요 그 자체였다.

그곳 뒤뜰에서 그는 카페를 꿈꾼다. 책이 있고 음악이 있고 대화가 있는 그런 곳을 몽상한다. 마음과 마음이, 자연과 사람이, 하늘과 땅이, 추상과 구체가, 현실과 판타지의 소통이 있는, 있어도 좋고 있지 않아도 좋은 공간에 대한 동경을 그는 그린다. 시골 뒤뜰 의자에 앉아.

오래전 일이다. 그가 대학생일 때 그를 오빠라고 불렀던 여자가 있었다. 학과 선배를 형이라 불렀던 그 시절, 장발 단속 경찰을 피해 골목을 다니던 그때, 그녀는 그를 오빠라 불렀다. 그 여자의 꿈은 오빠가 좋아하는 카페를 만들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 그것은 환상이었고 그 카페는 이상이었다. 환상의 그 여자는 대화가 필요했고, 음악이 필요했고, 사랑이 필요했고, 책이 필요했고, 커피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도 없다. 꿈은 언제나 비켜가는 법, 어긋나는 법.

그 의자에서 그는 한순간에 꺼져 버려도 좋은 ‘이상한 새(Die Fremdevogel)'를 떠올린다. 인간의 말을 배움으로 해서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새를 떠올린다. 197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웨덴의 작가 하리 마르틴손(Harry Martinson)의 거대한 까마귀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새처럼 한순간에 허공에 사라져버리기를 그는 꿈꾼다. 인간의 언어를 배워 인간의 본모습을 잃어버린 자신의 지식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하며 언어 이전의 자신의 모습을 찾아 떠나기를 원하면서, 언어 이전의 언어를 찾아 그는 시골 뒤뜰로 오곤 했다.

시골 뒤뜰은 여전히 그때와 변함없이 햇볕이 따스하다. 그 예전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곳에 앉아 그는 인간의 말을 하는 거대한 새. ‘이상한 새’ 자베트가 등대가 있는 마을의 작은 소녀 엘리자베트를 안고 날았던 그 회색 공간의 느낌을 찾는다. 그 새가 날아가려 했던 그 공간을 가늠한다. 그 공간은 그가 꿈꾸는 ‘가당치 않은 카페’ 속인지도 모른다. 자식들이 모두 떠나 외롭고 적막한 이 마을에 사는 노인들처럼, 좌초된 삶으로 인해 고향도 아닌 타향에 사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흩어져 사는 이 마을에, 촛불 같은 빛으로 남아도 좋을 카페 안인지도 모른다. 카페는 따뜻하면 좋고, 정겨운 말도 가득 차 있으면 더욱 좋고, 아름다운 색깔도 신기루처럼 깔려 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곳은 갈 곳이 멀리 내다보이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가로수 길처럼 뻗어있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가볍지만 유쾌하고 이상한 새, 거대한 까마귀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밥 짓는 저녁연기처럼 피워내는 곳이면 좋다. 노마드처럼 세상을 떠돌다가 돌아와 앉을 의자와 있으면 그것으로 족할 카페이다.

세상은 아프다. 마을 사람도 아프고 그래서 더욱 아픈 그에게 자리하나 마련해주는 곳이면 족하다. 커피 향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족하다. 이상한 까마귀 자베트처럼 어느 저녁,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허공 속으로 흔적 없이 꺼져갈 수 있는 그런 카페면 그만이다. 밖에서 답을 찾지 말고 안에서 해답을 구하라고 말하는 외로운 의자만 남겨두고.

'수필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벽보 붙이는 밤 / 정성화  (0) 2020.12.22
짐승에 관한 세 가지 이야기 / 이희자  (0) 2020.12.22
의자 / 장미숙  (0) 2020.12.18
이팝꽃 그늘에서 / 정희승  (0) 2020.12.18
12월에 대한 경배 / 정목일  (0) 2020.12.17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