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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벽보 붙이는 밤 / 정성화

부흐고비 2020. 12. 22. 12:23

집 나간 강아지를 찾는다는 벽보가 어느새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칠 년 전 반여동 S 아파트에 살았던 영어 선생님을 찾습니다."

이번에는 강아지 대신 사람을 찾는구나 생각하며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아! 그것은 바로 나를 찾는 벽보였다.

벽보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짐작한 대로 벽보를 부친 사람은 내가 이전에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였다. 딸아이가 부산의 중학교에 교사 발령을 받았다는 소식을 꼭 전하고 싶었는데,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것만 전해 들은 터라 벽보를 붙이게 되었다고 했다. 나를 감격하게 만든 벽보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벽보도 있다. 초등학교 때, 방학이 다가오면 다른 아이들은 이런저런 계획으로 들떠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 반대였다. 방학만 되면 서울에 있는 외삼촌댁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한 입이라도 덜어보기 위해 마치 배추를 솎아내듯 나를 솎아내는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안 가겠다고 떼를 쓸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느 놈이 방학이란 걸 만들어내 가지고 참…." 하는 아버지의 불평도 듣기 불편했고, 어머니가 바라는 일이라 나는 말없이 짐을 챙겼다.

어머니는 가끔 늦은 밤에 서울로 전화를 하셨다. 외숙모와 통화를 한 뒤에는 꼭 나를 바꿔달라고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외숙모가 들을까 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아무 소리 말고 잘 붙어있어야 한대이, 엄마가 데리러 갈 때까지는. 알겠제?"

나는 어머니가 서울에 붙여놓은 벽보였다. 하얀 쌀밥에 쇠고기 장조림을 먹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잤지만, 나는 집에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남루하고 좁아터지고 고함소리가 가득한 우리 집이 그리워, 밤이면 아무도 몰래 눈물에 젖는 벽보였다. 벽을 등에 지고 엎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벽에서 떨어져선 안 되는 게 벽보의 운명이다. 어머니가 나를 '떼러' 올 때까지, 나는 그때 비교적 착실한 벽보 생활을 했다.

'잘 붙어있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마음이 심하게 펄럭거리는 날이다. 고등학교 시절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그냥 뛰쳐나가고 싶었을 때, 직장 생활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을 때, 남편과 크게 다툰 뒤 어디론가 휑하니 가고 싶었을 때 등등. 어쩌면 어머니의 그 말이 지금까지 나를 지켜온 게 아닌가 싶다.

세상이란 벽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도 어쩌면 한 장의 벽보라고 할 수 있다. '나'라는 벽보로 인해 이 세상의 표정이 어두워지거나 한숨이 늘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게 드리운 모든 것이 헐값의 운명이란 느낌이 들 때면 슬며시 화가 난다. 내가 화를 내고 애태우는 것은 나의 벽보가 남들 것보다 더 번듯하길 바라서다. 또 내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이 더 따뜻하고 아늑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벽은 한때 햇살로 가득했다가, 조금씩 그늘이 지고, 때가 되면 어둠에 묻혀버린다. 이 세상에 온종일 햇살이 비쳐드는 벽이란 원래 없는 법. 그래서 해가 다시 뜰 때까지 벽보는 벽의 냉기를 묵묵히 견뎌내어야 한다.

자신의 벽보 한 장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고심하고, 죽을 때까지 끌어안은 채 고치고 손질하다 가는 게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곧장 떨어지고 말 벽보인데도 말이다. 다들 자신의 벽보에 대한 집착 때문에 다른 이의 벽보에는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허겁지겁 살다 가는 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 내가 진정 붙이고 싶은 벽보는 무엇인가. 나의 손때가 묻은 벽보 앞에서 나는 '나'를 보려고 애쓴다. 너풀거리는 귀퉁이에는 다시 풀칠을 하고, 찢긴 부분에는 종이를 덧대어 바르며, 지워진 글씨는 다시 선명하게 써넣는다. 그래서 벽보 붙이는 밤은 조금도 졸리지 않는다.

선상에서 전화를 걸어온 남편이 대뜸 말한다.

"어, 요즘은 집에 잘 붙어있네."

은근슬쩍 내게 풀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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