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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돈가스 / 오세윤

부흐고비 2021. 1. 28. 13:02

지공족(지하철 경로우대)이 된지 6년째인 올해 들어서부터 나는 전철을 타면 버릇처럼 노약자석으로 간다. 앉아서 갈 확률이 높은 데다 마음도 편하기 때문이다.

지난해까지는 그러지 않았다. 내 딴에는 아직 다리 힘이 멀쩡해 구태여 노인입네 티를 내고 싶지 않은 알량한 자존심(?)에서 자리가 나도 선뜻 가서 앉지 않았었다. 게다가 노약자석에선 가끔 지린내 같은 기분 언짢은 냄새도 났고, 때로는 낮술에 취한 노인들이 침을 튀기며 시국을 개탄하고 젊은이들을 싸잡아 성토하는 바람에 귀가 피곤해지고 앉아 듣기도 민망했다.

이런저런 핑계로 나는 될수록 전철을 타면 중앙으로 가 두리번거리며 빈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점차 눈치가 보였다. 꼭 젊은 사람들의 자리를 빼앗아 앉는 염치없는 늙은이가 되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일에 지친 몸을 잠시나마 앉아 쉬어 가려는 젊은이들,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공부하다 귀가하는 학생들이 앉아야 할 자리를 가로채는 것처럼 몰염치하게 생각됐다. 매달리듯 손잡이를 잡고 서서 하품을 하는 직장여성을 본다는 것은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꼬고 앉은 발을 풀라는 말에 말 못 할 행패를 부린 젊은이의 동영상을 본 뒤로는 더욱 더 중앙으로 가기가 껄끄러워 아예 처음부터 노약자석으로 간다.

오늘도 그랬다. 치과 치료를 마치고 경복궁역에서 전철을 타자 바로 노약자석으로 갔다. 하지만 세 자리 모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출입문 쪽 자리에는 쪼글쪼글 몸피 작은 노파가, 가운데엔 마른체형의 노인이, 그리고 끝자리엔 같은 70대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의 노익장이 정장 차림으로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정장 노인은 옆 사람의 불편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신문을 양면 모두 펼친 채 태연하게 보고 있었다.

눈에 거슬렸다. 저지난해 일본을 여행하고 온 뒤로 나는 전철 칸 안에서 큰소리로 하는 핸드폰 통화 소리와 저렇듯 남에게 불편을 주며 신문을 있는 대로 펼치고 보는 행태가 부쩍 더 신경에 거슬렸다. 정장 노인에게 웃으며 부탁했다. “좀 접어서 보시지요.”

눈을 치떠 흘낏 내 얼굴을 쳐다본 노인이 아니꼽다는 듯 내 전신을 훑어 내리고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다시 신문에 눈을 주었다. 네가 뭔데 남 신문 보는 걸 시비하느냐는 찌푸린 얼굴, 참 남 생각 안 하는 오만한 사람이구나.

헌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사각 턱에 떡 벌어진 어깨 하며 거무튀튀한 피부. 그래, 바로 그 선배였다. 야간중학교 1학년 때 고등학생이던 주일학교 선생님. 고 1때 교생실습을 나왔던, 사대 체육과 학생이던 안 선배 바로 그 사람이었다. 왼쪽 눈썹 머리에 녹두 알만한 까만 사마귀가 선배인 걸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할 일이었다. 50년 전인 그때와는 전연 딴 모습인 나를 어찌 알아볼 수 있으랴. 영양부실로 비쩍 말랐던 몸이 78kg으로 부해지고, 반나마 허옇게 센 머리도 주변만 남은 반 대머리를-. 게다가 안경까지 썼으니 그가 몰라볼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고 1이던 그 봄, 나는 말로 다하기 힘들게 불만 가득한 학생이었다. 두 살 터울인 여동생과 같은 학년이 된 것도 억울한데 그 아이와 한방을 쓰며 학교를 다녀야했으니 불만이 생겨 쌓여도 보통 쌓이는 게 아니었다. 모든 게 전란 때문이었다.

1953년 피란지 홍성에서의 2월, 배화여중에 합격했다며 서울의 큰아버지 집으로 떠나는 동생을 멀건이 눈으로 배웅한 나는 전날처럼 빈 지게를 걸쳐 메고 나무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지게 작대기로 길가의 마른 풀을 후려쳐 꺾어가며 한티 골 30리 길을 가고, 나무 한 짐을 분기憤氣로 지고 돌아왔다. 그날따라 할머니는 갈 때도 왔을 때도 “조심해 갔다 와라.” “이제 오냐, 힘들었겠다.”란 의례적인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공부를 못할 바엔 돈이라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는 바로 다음 날부터 5일장을 도는 장돌뱅이를 시작했다.

그래도, 하늘은 무심하지 않아 요행 그 봄에 읍내에 야간 고등공민학교가 생겼다. 덕분에 나도 야간일망정 중학생이 될 수 있었다.

공부는 나에게 굶주린 맹수 앞에 얼쩡거리는 먹이에 불과했다. 모든 울분과 서러움과 청소년기의 이유 모를 반항심을 모두 공부에 쏟아부었다. 아마 내 생애 통틀어 그때를 시작으로 한 중·시절처럼 맹렬하게 공부한 적은 없었던 듯하다. 의과대학생이 되고서도 그렇듯 미친 듯이 공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한 나는 별수 없이 큰 아버지 집에서 그 여동생과 한방을 쓰면서 학교를 다녀야 했다.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렇듯 거북살스럽고 고약하게 처사한 부모가 야속해 원망도 많이 했다.

그 무렵 안 선배가 교생실습을 나왔다. 불만 가득하고 지극히 외로울 때 구면의 선배가 왔다. 어느 토요일 방과 후, 선배가 점심을 사주겠다며 학교 앞 양식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돈가스! 매일처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도 언감생심 침도 삼키지 못하던 식당에 앉아 처음 먹어보는 양식. 그날 나는 선배가 묻는 대로 나의 가정 사정을, 그간 옹이져 있던 분한 속을, 어머니에 대한 원망을, 동생을 향한 미움을 온통 털어내 미주알고주알 고해 바쳤다. 서럽고 분한 속내와 치부를 모두 들어내 낱낱이 고해 말했다. 이해하는 듯 끄떡이고, 측은한 듯 바라보며 부드럽게 이것저것을 묻는 선배에게 고자질하듯 나의 모두를 까발렸다.

속이 후련했다. 앞으로 무슨 고민거리가 생기면 선배에게 이야기하면 모두 통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주 만나 이야기하자던 선배는 그 후 단 한 번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선배의 친절이 다만 교생실습 과제 중 하나인 학생 신상파악인 것이었을 뿐이란 걸 깨닫게 된 건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를 알아가기 시작한 한참 후의 일이었다.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젊음을 얻었다지만 나는 돈가스 한 그릇에 속을 팔고 바보가 되고 씁쓸한 뒷맛만 얻었다.

알은체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참에 선배가 벌떡 일어나 황급히 내렸다. 충무로 환승역이었다. 생각을 돌렸다. 그래도 선배는 돈가스 한 그릇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내내 행복했을 테고(모르긴 해도 그 리포트로 선배는 분명 A학점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섣불리 털어놓지 못하던 속을 털어 잠시만이나마 속이 후련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아 스스로를 보상하자고-. 선배가 앉았던 자리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내리고 앉으며 바닥에 손을 대 보았다. 온기가 따끈하게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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