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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잠박 / 이양선

부흐고비 2021. 1. 28. 13:24

2008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당선

오랜만에 아버지 산소에 들렀다. 고향 집 안채는 먼 친척이 살고 있다. 잠실로 쓰던 아래채에는 어머니 아버지가 쓰시던 가재도구와 농기구들이 시간이 정지된 채 서 있다. 시대의 흐름에 밀릴 대로 밀린 잠박들도 모퉁이에 높이 쌓여있다. 금방이라도 누에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주인을 잃은 채 한 세월을 보내고 있는 잠박들 사이로 얼핏 어머니가 서있는 모습이 겹쳐온다.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층층으로 쌓아 올린 잠박 위의 수많은 누에들이 뽕을 먹느라 여념이 없다. 정겨운 소리이다. 초등학생인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아침을 맞았다.

직사각형의 잠박은 누에를 칠 때 사용하는 채반이다. 가난이 일상인 시절 농촌에서는 누에치기가 큰 농사 중의 하나였다. 뽕밭이 푸르름으로 짙어지면 안방 아랫목은 자연스레 누에 차지가 되었다.

두 잠에서 깬 누에가 갑자기 토했다. 하늘만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이웃 담배밭의 독한 기운이 아무래도 뽕잎에 배인 모양이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닥쳤다. 뽕밭 주변에서는 담배 농사를 짓지 않는 불문율이 깨진 것이었다.

담배밭 집은 들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닭이 주변의 남의 밭을 헤치기 일쑤였다. 참다못해 누군가 몰래 약을 풀어 닭이 죽었던가 보다. 그 파장은 인근의 뽕밭에 일파만파로 번졌다. 여기저기서 원성이 터졌다.

어머니는 담배밭 집으로 달려가 원망을 하다 하소연까지 하였다. 담배밭 주인은 벽창호였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한동안 누에가 여기저기서 죽어나갔다.

밭 주인의 몰인정에 체념한 어머니는 장독간의 큰 소래들을 들어내어 물을 가득 채웠다. 담배 성분이 다 빠질 때까지 번갈아 가며 뽕을 두, 세 번 물에 우려냈다. 우린 뽕은 그늘에 완전히 말린 다음 누에를 먹였다.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노심초사하였다.

누에가 석 잠을 자고 일어났다. 눈코 뜰 새 없는 와중인데 나는 그만 앓아누웠다. 며칠째 영문 모를 고열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밤새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식혔다. 비몽사몽간에도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면 철없는 가슴이 메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내가 정신을 놓지 않게 된 유일한 힘이었다.

엿새가 지나면서 가까스로 털고 일어났다. 부쩍 자란 누에 때문에 잠박은 천정 높은 줄 몰랐다. 뽕을 주기가 바쁘게 먹어 치우는 녀석들 때문에 도무지 정신이 없게 되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어머니가 뽕을 따오기가 바쁘게 소래 세 곳에 물을 채웠다. 큰 소래를 채우는 펌프질은 지루하다 못해 어깨죽지가 빠지는 중노동이었다. 따온 뽕을 그냥 올려주는 친구 집이 부러웠다. 담배 밭 주인이 몹시 미웠다. 담배밭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고단한 한숨도 깊어 갔다.

마지막 잠에서 일어난 누에가 부지기수로 늘어났다. 안방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워 남새밭에 새로 지은 잠실로 이사했다. 이제는 뽕을 따는 것으로도 부족해 뽕나무를 가지째 꺾어와 줄 정도로 누에의 식욕이 왕성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누에의 똥을 갈아주는 일이 나는 여간 귀찮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쁜 나머지 끼니도 걸렀다. 밤잠이 모자란 나에게는 그만 자라고 하면서도. 그럴 때면 공판 날 받게 될 주름치마와 분홍색 운동화를 꿈꾸며 부지런히 거들었다.

겨를이 없는 중에도 나는 종종 누에들이 뽕을 갉아 먹는 소리에 취하곤 했다. 먼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같았다. 아니 솔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비 오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청량한 소리에 젖노라면 노곤이 잠시 사라지곤 했다.

누에는 제 몸 길이의 십만 배가 넘는 실을 끊임없이 토하다 끝내 고치 속으로 사라진다.

솔가지에서 누에고치를 따던 날 어머니는 오랜만에 웃었다. 그간 쌓인 시름이 한꺼번에 씻기나 보다. 우리 집 고치는 최상품으로 감정이 매겨졌다. 담배 밭 때문에 홍역을 치렀던 땀들이 벅차기만 했다.

나는 어머니의 노고를 생각하며 잠박을 쓸었다. 반질반질하게 손때가 묻은 잠박에서 누에의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진다.

쉼 없는 노동력으로 쉴 새 없이 실을 뽑으며 야위어가는 누에는 다름 아닌 어머니 모습이었다. 평생 근면과 검약으로 고향의 전답을 일구신 어머니는 당신의 전부였던 땅에 얼마 전 자식들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고향에 먼저 묻혀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며 홀가분해 하신다.

살다 지칠 때 나는 자주 그 시절의 어머니를 떠올려본다.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른 어머니가 뽕을 가득 담은 소쿠리를 들고 들어설 것만 같다. 잠박 곁에서 졸고 있는 내 모습도 환영처럼 스친다.

 

 

이양선 씨 수상소감 - "삶 애환·기쁨 제공하고 싶어요"

 

“자칫 흘려넘길 수 있는 삶의 애환이나 기쁨과 같은 소재를 찾아내 독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잠박’이란 제목으로 수필부문에 당선돼 이날 수상을 한 이양선(48·익산)씨의 소감이다.(소인섭 기자)

“3수 끝에 당선된 것이라 더 기뻤어요. 꼭 신춘문예를 통해 제 글이 세상에 알려지길 소망해 왔던 터라 그동안의 낙방이 ‘글쓰기가 참 어렵다’는 교훈을 줬고 이렇게 당당히 걸어 들어와 기뻐요. 그간 많이 울었는데 그런 시행착오가 공짜는 아니었다는 생각이죠.” 이씨는 수필에 대해 “작가와 독자가 쉽게 만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우리 생활에서 삶의 의미를 일깨우고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데는 시나 소설보다 수필이 훨씬 전달력이 강하다고 봐요. 맵고 짜고 신 편린들이 진실을 바탕으로 잘 녹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수필을 가르쳐준 선생님한테도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원광대 사회교육원 박용학 선생님은 나태해지지 않도록 매서운 회초리를 들곤 했죠. 그것이 매진할 수 있었던 동기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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