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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풀무 / 황진숙

부흐고비 2021. 2. 1. 15:10

제10회 백교문학상 우수상

풀무를 돌린다. 쇠바퀴가 삐걱대며 돌기 시작한다. 지나온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흔적을 남기는가 보다. 푸르죽죽한 이끼로 뒤덮인 기억들이 바퀴를 타고 돈다. 프레임으로 돌아가는 흑백영화가 되어 과거의 소리를 들려준다. 봉창을 통해 흐르는 별빛과 달빛 소리, 타오르는 장작불 소리, 김을 올리는 가마솥의 하품소리, 부지깽이로 장단 맞추는 소리가 설핏 풀무에게서 들린다. 별스러울 것 없이 빙그르르 이는 소리에 마음이 하뭇해진다.

가슴에서 내놓는 한줄기 바람으로 한때는 호시절을 누렸을 풀무. 무쇠로 만들어졌으니 몸태의 질감은 무겁고 거칠다. 허나 속은 텅 빈 채, 가슴에 바람개비 하나 달고 바삐 돌아간다. 바람을 보내기 위해 얼마나 아파해야 했을까. 터져 나오는 한숨마저 어둠으로 가려야했던 걸까. 품어낸 바람을 내보낸 빈 가슴의 어둠과 고독이 적막하다. 풀무에게도 생기발랄한 처녀시절이 있었을 게다. 대장간을 나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초가집 정지에 들어서기 전까지 꿈으로 부풀어 올라 있었겠지. 아궁이에 바람을 내어주며 따스한 불기운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부뚜막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자적하는 삶을 꿈꾸기도 하였다. 구수한 냄새에 깃든 투박한 여유를 느끼리라 기대했다. 돌고 도는 고단함에 날개가 꺾이고 삭아가는 쇠바퀴에 푸른 꿈은 빛을 잃어갔다. 아궁이의 그을음으로 얼룩진 가슴, 시린 등을 타고 흐르는 냉기에 육신은 메말라갔다. 비루한 시간 속에 갇힌 존재의 남루함이 잿빛으로 어룽진다. 풀무가 돌면 단단하게 눌러놓은 내면의 슬픔이 밖으로 회오리친다. 미동도 없는 삭신 위로 애처로운 지난날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해가 저물고 어스레해지면 어머니가 부엌에서 풀무를 돌리셨다. 그 시간은 언제나 평온했다. 층층시하 시집살이로 종종거렸던 맏며느리의 분주함을 내려놓는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일정한 장단으로 덜 마른 솔가지나 생나무에 불씨를 살렸다. 마구 돌리는 센 바람이 외려 불꽃을 꺼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불씨와 바람이 서로 보듬어 불길이 일 수 있도록 장단을 조절해야 했다. 풀무의 리듬에 따라 살아나기도, 사그라지기도 하는 불꽃을 보며 어머니는 새색시 적 꿈을 열망했는지도 모른다.

집안에서 정해준 배필을 마다하고 두메산골로 시집온 어머니. 비록 정화수 한 사발의 언약식이 다였지만 진심을 다했기에 사랑으로 가족을 이루는 평범한 꿈이 있었다. 회전하는 풀무가 그리는 원처럼 굴곡 없는 삶이면 좋으련만. 어머니 생은 변곡점의 연속이었다. 막내아들을 사고로 잃자 아버지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가난을 탓하고 운명을 탓하던 아버지는 빚쟁이에게 쫓겨 집을 나가 버렸다. 홀로 남겨진 어머니의 가슴으로 온갖 시련이 숨어 들었다. 지아비 없이 지탱해 나가야 하는 고통이 어머니를 옥죄었다. 설상가상으로 장남은 병명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아 누웠다. 어머니는 가슴이 우는 소리조차 낮추어가며 눈물로 침윤되는 밤을 지새웠다. 마음이 타 들어가고 적빈하기만 한 세월이었다.

두려움과 절망은 형체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영혼을 잠식한다. 생의 의지를 바닥으로 끌고 가서 흔들고 부딪히며 짓이겨 놓는다. 허나 그 끝엔 솟구쳐 오르려는 강한 열망이 있다. 생과 사의 줄을 타고 있는 자식의 숨소리가 쓰러져가는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호흡기에 의존한 미약한 숨소리가 어머니의 심장을 떄렸다. 가물거리는 불씨 앞에서 어머니는 다시금 풀무를 돌렸다. 매캐한 연기가 앞을 가렸지만 어머니는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지속적인 풀무질로 불씨를 살려 그 연기를 걷히게 했다. 바람의 손끝이 되어 숨결을 불어 넣어 주었다. 그 숨결은 마지막 안간힘이었다.

어머니는 풀무를 돌리며 고뇌와 시련을 바람으로 밀어냈을지 모른다. 거스를 수 없고 내려놓을 수 없어 첩첩히 쌓인 비애들을 바람에 날려 보냈을 터이다. 어둠에 갇힌 듯 엄습하는 위태로운 마음을 다잡기 위해 끊임없이 돌렸을 터이다. 제 몸을 돌려야 했던 풀무처럼 어머니가 인내했던 모진 세월은 켜켜이 쌓여 옹두리가 되었다. 안으로 삭히며 감내했던 시간들은 한 몸을 이루며 단단한 벽을 만들었다.

설한풍이 불어대는 생의 질곡을 견딘 어머니. 삭정이가 된 비곤한 육신으로 여전히 풀무를 돌리는 어머니. 헤진 가슴으로 마른 바람을 내보내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 어머니가 살아내신 이유, 존재의 의미, 바로 깊은 사랑이다. 객지를 떠돌던 지아비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고, 병석에 누워 있던 아들을 살려낸 힘이다. 강인한 의지로 가족을 지켜낸 힘이다.

운명을 비껴가지 않으려 돌리고 돌렸을 풀무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이 얼비친다. 고통의 기억과 상처의 흔적마저 보듬은 어머니의 사랑이 바람을 품은 풀무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빈 가슴의 뚝기로 일으킨 생의 불길이 잔잔히 내 가슴에 스며든다. 삶에 지쳐 있을 때 주저앉고 싶을 때 저 활활 타올라 내 삶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평생 어머니 곁을 따라다녔던 풀무는 이제 시간 속으로 침잠하려 한다. 오롯이 박혀 있는 기억의 무게가 침묵속으로 가라앉는다. 변해가는 세상에서 풀무의 존재는 서서히 잊히겠지만 그 의미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러져가는 풀무가 굽은 어머니의 등처럼 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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