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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 / 황진숙

부흐고비 2021. 2. 1. 15:02

어둠을 드리운 장막을 들춘다. 음습한 기운이 끼쳐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지 못한 억울함에 신열로 들끓고 있는 걸까. 떫은맛 뱉어낼 때까지 아무도 건져주지 않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걸까.

좌정한 독 안에 들어앉아 밑바닥의 시간을 세고 있는 감이 있다. 누가 오는지도 모른 채 잎사귀 뒤집어쓰고 요지부동이다. 낮달과 밤달 아래 한 줌의 볕살 들이고 한 모숨의 바람 모아둔 몸이다. 시푸르뎅뎅할 때부터 주황빛 물들 때까지 온몸으로 껴안고 있던 탄닌이었다. 다녀간 천둥과 번개로 속에서 불길이 일고 후려치는 소낙비에 두들겨 맞을 때도 놓지 않고 붙잡고 있던 억센 기운이었다.

떫은맛 빼자고 소금물에 몸을 담근 절박함이 까슬하다. 하루분의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침몰했지만 해가 지는지 동이 트는지 알 수 없는 이 암흑이 갑갑했을 것이다.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려 보지만 제자리다. 버둥거려 봐야 자맥질하기 일쑤다. 너른 세상에 그들이 있다면 꽃그늘만을 꿈꾸었을 테다. 남들이 흠모해 마지않던 부드러운 속결을 지닌 선홍빛 홍시가 되고 싶었을 터이다. 말랑하면서 쫄깃한 곶감으로의 변신도 기대했겠지.

비좁은 곳에 갇힌 막막함에 말을 잊었는지 항아리 안이 적막하다. 밀려드는 짠물에 휩싸여 소리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할 수 있다며 소리 없이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품고 있던 떫은맛을 내어놓고 단맛을 좇아야 하는 갈등, 스며드는 소금기를 다스려야 하는 분기, 가라앉고 싶은 절망과 솟아오르는 열망. 속을 훑는 시퍼런 기운 속에서 감은 단호히 숨구멍을 열었다.

울컥, 아릿한 통증이 몰려온다. 수몰됐을 생것의 풋내가, 억눌렀을 혈기가, 삭여냈을 서러운 숨소리가 질척한 슬픔으로 와 닿는다. 어둠을 허물기 위해 소리 없이 인내한 자의 모습이 저럴까. 살아내는 것이 어둑하게 물드는 일일지라도 침잠하는 시간 속으로 깊어지는 일일지라도 포기할 수 없어 가슴 밑바닥까지 긁어내는 일인 것을.

유배지 같은 곳에서 격랑에 휩싸인 감이 내 몸 어딘가에 박혀 있는 기억들을 불러낸다. 앙다물어 보이지 않던 그것은 뻑뻑하게 조여들며 감각을 마비시키는 탄닌이었다.

지난 시절 가난으로 뒤덮인 흙벽의 집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손톱 밑의 까만 때처럼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마음이 바닥으로 내려앉아도 기울어져가는 벽에서 떨어지는 흙부스러기와 구멍 난 비닐장판, 들랑거리는 바람에 허연 입김이 그대로인 냉골이었던 집에서는 등조차 기댈 수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침침하고 초라했던 그곳에서는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먹빛 같은 어둠이 드리우는 결핍은 서늘했다. 불어오는 실바람도 된바람으로 느껴질 만큼 일 년에 한 번이면 족할 꽃샘잎샘이 가슴 한쪽에 늘 자리하고 있었다. 꿈꿀 수 없는 우중충한 현실에 움츠러들고 의지처였던 피붙이들의 죽음에 옹그렸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사는 아버지의 부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소용돌이쳤다. 뭉개진 마음들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짓눌렀다. 점 하나 찍기에도 버거운 내면의 시간들로 나는 서서히 말을 잃고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늘에 옹송그린,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 오랫동안 들어앉아 있었다.

되돌아보면 가슴을 긋고 간 지난 시간들이 아득하기만 하다. 멀어져간 슬픔인 것 같은, 가벼워지지 않는 습기 같은 기억들. 삼키지 못해 뭉쳐둔 사연들이 얼마던가. 삭이지 못한 비린 생각들이 오기를 더했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들이 마음자리에 고여 버석거리곤 했다. 떫은맛이 무르익은 뒤에라야 단맛이 오듯이 감은 그윽함으로 가기 위해 거센 텁텁함을 내보였는지 모른다. 누구보다 다디단 맛을 내기 위해 그토록 떫었는지도 모른다.

무섬증이 이는 캄캄한 곳에서 묵언설법 중인 감. 앉은자리에서 스스로를 아물리고 있는 그의 시간이 결여하다. 좌절도 절망도 둥글게 안아 기어이 단맛으로 승화시키는 고요가 담담하다. 빛깔로도 소리로도 제 속을 드러내지 않는 우묵함이다. 기다리고 참아내는 과정을 거쳐 더없이 깊어졌으리라.

동안거를 지나 나이테를 불린 나무처럼, 흙속에 파묻혀 싹을 틔운 씨앗처럼 풍랑이 몰아치는 푸르스름한 바다에 잠겼다 떠올라야 하는 게 세상살이일 터이다. 켜켜이 쌓인 어둠을 밀어내고 거친 숨결을 가라앉혀 침시로 거듭나듯이 고난에 달구어지고 시련이 파고들어도 안으로 궁굴려 나만의 무늬로 완성시켜야 함이다. 나 역시 아직은 성글고 옹골차지 못하지만 건너온 감의 시간들로 진득해지고 싶다. 무뎌진 내 안의 나를 일으키고 싶다.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반딧불이나 향으로 존재를 나타내는 유자같이 맛으로 제 안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감이 우련하다. 항아리 속에서 뒤척임없이 고요히 머물고 있는 감을 눈으로 품는다. 가을 녁 피어 올리는 감빛이 참하다. 가슴에 감등 하나 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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