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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압화押花 / 설성제

부흐고비 2021. 2. 4. 09:13

불 꺼진 창문 앞을 오랜 시간 서성이다 돌아온 날이면 압화 접시를 꺼내 든다. 어딘가에서 눈비 맞으며 피었던 꽃잎들인가, 아니면 어느 길가에서 철없이 피어 원도 한도 없이 향기를 뿜어왔던 꽃들인가. 하얀 접시 위에 다시 피어난 꽃들과 눈을 맞춘다.

물관으로 들이마시는 숨을 내뱉기가 힘이 들었다. 아마 심장이 짓눌리고 숨통이 조여들어, 마신 햇살과 바람이 전신을 통과할 때 여리디여린 몸피는 이미 이 세상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힘으로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를 고스란히 받아왔다. 누군가 모로 뉘어주어 바늘구멍 같은 숨통이라도 열어주었으면 싶었다. 살고 싶다는 절규의 시간도 이미 사그라졌다.

이대로 눌려야 한다. 산에서 들에서 바람 따라 햇살 따라 어우렁더우렁 지내왔던 시간도 있었지만 비와 태풍에 시달렸던 시간도 있었다. 억울함도 분함도 있는 대로 발설하고 살 수 없다. 눌려야만 제2의 생명을 받을 수 있다.

꽃의 생명은 향기다. 그 향기마저 눌려야 새로운 꽃으로 피어날 수 있다. 마치 솔개가 어느 시점이 되면 제 부리를 자르고 제 발톱을 빼내어, 그것이 다 자라면 제2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한번은 거듭난 후에야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처럼, 꽃도 그러하다.

한번 피었다가 지는 꽃, 향기를 발하고 벌과 나비를 불러들여 번식을 하지만 생명은 그야말로 일장춘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도록 보고 싶어 조화를 만들기도 하고 드라이플라워도 한다. 화가들은 살아있는 꽃을 그리고 사진작가들은 꽃을 찾아 천지를 떠돌기도 한다. 그러나 본래의 색깔을 훼손하지 않고 꽃의 아름다움을 오랜 시간 곁에 둘 수 있는 것은 압화다.

하늘만 바라보며 제 맘대로 허공에서 흔들리다 지는 꽃잎을 낱낱이 떼어 내어 두꺼운 책으로 누른다. 압사당할 것 같았던 꽃잎은 용케도 제 모습과 빛깔 그대로 살아난다. 다시 새로운 꽃으로 피어난다. 조선 시대 책만 보는 바보였던 이덕무가 밀랍으로 만들어 피워낸 윤회매(輪廻梅)가 아닌, 제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꽃들이 또 다른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그런 얇디얇은 꽃잎이 제 무게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무거운 것에 눌리는 시간을 보낸 후에야 피어나는 생명이다.

오래오래 향기를 간직하는 삶이란 자신을 누르고 눌렸을 때 가능한 일인 것을. 무수한 꽃들이 그 아픔을 맛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애석하다. 한번 피었다 지는 꽃이 아니라 밑그림 없이 그저 떠오르는 대로 꽃잎 한 장 한 장 만나 새롭게 핀 꽃누르미가 되기까지 집요한 침묵만큼 무거운 무게가 또 있으랴.

침묵을 덮고 잠을 청한다. 숨을 참으며 눈을 감은 채 멀어져가는 기억들을 붙잡아본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 채로 고스란히 눌려야 하며 말하지 못한 것도 그냥 덮어야만 한다. 바람에 실려 가는 향기가 아닌, 어떤 비바람에도 향기를 놓치지 않는 꽃으로 피고 싶어 눌림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다시 꽃이 핀다.

누구나 존재 자체가 죄던가.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다시 태어남 없이는 진정한 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접시 위에서 단아하게 피어 있는 꽃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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