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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소만小滿에 부치다 / 설성제

부흐고비 2021. 2. 4. 13:01

소만(小滿)에 이르렀다. 여름 문턱에 들어선 후 처음 만나는 절기로 햇볕이 많고 만물이 점점 생장하여 가득 차오른다는 의미를 가졌다. 실제로 꽃이 떨어지고 열매가 맺기 시작하는 시기, 벌과 나비를 불러들이던 꽃이 제 임무를 다하자 나무에게 새로운 일이 시작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꽃이 져야만 하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 소만은 멸(滅)에서 생(生)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와 같은 시기이다.

도도한 봄날이었다. 담벼락에 줄지어 서서 오줌을 누는 개구쟁이들처럼 노란 개나리가 새실거렸다. 목련은 나뭇가지 위로 촛대를 세우고 심지에 불을 밝혔다. 돌 틈에 앉은 영산홍도 한껏 타올랐다. 뒤이어 조팝과 이팝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하얀 튀밥을 쏟아냈다. 배와 사과며 복숭아나무에도 꽃이 피어 서로의 존재를 알렸다. 꽃을 보고서야 이름을 알아주는 것이 서운한 듯 저마다 향기로 사람들을 불러댔다.

그제야 나도 아파트 마당에 앉아 꽃잎을 헤아리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다 시멘트 바닥에 내려앉아 퇴색되어가는 꽃잎에서 화무십일홍, 짧은 생에 대한 안타까움을 보았다. 존재의 무상함이 애달팠다. 꽃의 향락을 쫓아다니던 내 인생의 봄도 이제는 꽃잎을 하나씩 내려 놓아야 할 때가 되었던가. 공원 한켠에 뒤늦게 자리 잡은 꽃 잔치도 기꺼이 막을 내렸다. 달고 따사로운 햇살을 떠나지 못해 머뭇거리다가도 꽃은 때에 순복했다.

어느새 완연한 초록의 계절을 맞고 보니 떨어진 꽃자리에 할 일을 마친 후련함이 보였다. 떠난다고 끝이 아니며, 슬픈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인생에서도 꽃이 졌다고 청춘이 식은 것은 아니다. 내일을 향한 그리움을 품고 더 큰 열망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꽃이 져야만 열매가 맺힌다. 벌과 나비가 부지런히 꽃술을 퍼 나를 때부터 꽃은 열매를 꿈꾼다. 언젠가는 제자리를 털고 떠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미련 없이 낙화하는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되레 꽃놀이를 즐겼던가 보다. 하다못해 텃밭에 핀 냉이꽃, 파꽃, 부추꽃도 꽃 진 자리에 씨를 남겨 거룩한 본능을 실천한다.

자리를 내어준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꽃이 진다고 그 자리에 모두 열매가 앉는 것도 아니다. 비록 열매가 맺었다고 해도 햇볕과 물이 주어지고 바람이 다녀가야 하며, 벌레로부터도 상하지 않아야 한다. 태풍도 홍수도 잘 이겨낸 뒤에야 비로소 참된 열매로 영글어질 수 있다.

자식은 부모의 열매다. 많지 않은 자식이라 애지중지하며 마음에서 놓지 못해 그 끈을 묶어놓는다. 해서 좋은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품안에 넣고 있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부모는 마음자리를 비울 수 있어야 한다. 맘껏 자라 무르익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부모도 자식도 결국 시들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식도 부모가 비켜주는 자리만큼 성장하기에 인생사도 꽃 지고 열매 맺는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소만, 열매를 위해 꽃을 거두는 이 절기야말로 축복의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올봄, 꽃이 질 무렵 몸이 무던히 아팠다. 인생의 절기를 제대로 계산하지 않은 탓이었다. 봄의 열락만 즐기려 내 안의 꽃에 집착했는지도 모른다. 놓아버리고 싶지 않는 것들, 오래오래 붙잡고 싶었던 것들이 시들어가며 향기마저 사라지는 것 같았다. 가지가 꽃을 떨어뜨릴 때의 고통이 싫다고, 지는 꽃도 그 아픔이 힘들다고 서로 놓지 못한다면 곪을 수밖에 없다. 자기로부터 자신을 거둠질한다는 것만큼 어려움도 없는 것 같다.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부합 하며 또 하나의 계절을 받아들여야 하리라. 그렇다면 떨어진 꽃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이제 맺고 영글어가야 할 열매를 생각해야 한다. 성경에 9가지 열매가 나온다. 사랑, 희락, 화평,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누구나 축복의 삶을 위해 이 열매를 갈망한다. 지금껏 붙들고 싶었던 내 안의 욕망의 꽃들을 놓지 않고서는 이런 거룩한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더구나 이 중 어느 하나도 고통의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훗날 나의 꽃 진 자리에 맺힐 열매는 무엇인지, 내가 맺어야 할 열매는 또한 어떤 것인지 그려본다.

만물의 품으로 바람과 햇볕이 그득해지는 절기, 소만(小滿)이다. 영장(靈長)의 품속까지도 모든 것이 풍성해질 것이다. 꽃이 내어주고 간 자리 자리마다 열매가 차오를 것이기에 미리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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