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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감출 수 없는 것 / 설성제

부흐고비 2021. 2. 4. 11:01

재채기 소리가 하루 열두 번도 더 들려온다. 재채기 한 방에 창문이 덜커덩거리고 이 여파로 아파트 담벼락까지 흔들리는 것 아닌가 싶다. 사람 몸속에 장착된 대 포탄. 버튼을 제 맘대로 조작하는 천지무법자 하나가 분명 몸 어딘가에 살고 있다. 심심하면 쏘아대며 이웃인 내 마음에 난동을 부린다.

  뉴스에서 보니 위층에서 들려오는 소음을 견디다 못한 아래층에서 막대기로 천장을 쑤셔댔다는 보도가 나왔다. 내 이웃 아파트에서는 한밤중에 어느 아저씨가 코뿔소처럼 씩씩대며 윗집을 들이박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한쪽이 이사를 가는 일이 일어났다. 어디에서는 층간소음으로 우발적 칼부림까지도 일어난다니 일상이 테러 밭 같다.

  발자국 소리, 물 내리는 소리, 가전제품 돌아가는 소리에 비하면 재채기는 시답잖은 소리인가. 그런데 나는 왜 재채기가 터져 날아올 때마다 내 몸이 분해될 것처럼 치가 떨리는지. 당장 팔을 걷어부치고 찾아갈까 수십 번 망설였다. 눈을 세모로 치켜세우고 시뻘건 입술로 껌이라도 씹으며 팔을 걷어 올리고 한판 붙고 싶었다. 괜히 나서지 말고 관리소에 일러볼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보나마나, 막상 재채기 주인을 만나면 아무 소리 못 하고 돌아설 나. 발자국 소리 때문이라면 한 번쯤 하소연했을 수도 있겠지만, 재채기는 그럴 수 없었다. 세상에서 숨길 수 없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나머지 하나는 재채기라는 말도 있지 않나. 이 생리적 현상을 어떻게 틀어막는단 말인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수뿐, 참을 수 없는 소음 때문에 짐을 싸야하나 싶다가 마음을 다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세상 다 다스려도 마음만은 범접할 수 없는 지대다. 몸속 어딘가 손이 닿을 수 없는 곳, 재채기 포탄을 움직이는 천지무법자 곁에 붙어살지도 모르는 이 마음. 바로 곁에 있는 천지무법자 하나도 해치울 수 없을 만큼 무능한 것이 또한 마음이다. 그러니 저 재채기 주인도 튀어나오는 포탄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묘안을 찾다 생각해낸 것이 재채기를 묻어버리기로 한 것이다. 이해와 관용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사방 벽 속에 재채기 소리를 묻고 다시 벽을 발라버리리라고. 에드거 엘런 포의 <검은 고양이>에서 심기를 불편하게 하던 고양이를 벽장 속에 묻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재채기가 들려올 때마다 무시(無視)의 열쇠로 벽을 열어 소음을 묻고 다시 무관심으로 발라버린다. 몇 번 그렇게 하자 재채기는 이제 벽장 속이 제 있어야 할 곳인 양 스스로 빨려 들어간다. 벽장 속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한다. 내 귓속으로 들어오면 길을 잃어버리는 재채기에 한동안 평안했다. 까짓것 아무것도 아니네, 라고 생각했을 즈음 다시 고갤 쳐들기 시작한 대 포탄 소리. 한동안 벽장 속에 묻혔던 재채기 소리까지 벽을 긁으며 기어 나와 합세한 듯 더욱 신경을 긁어댄다. 무시와 무관심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귀만 더 예민해진다. 재채기는 날마다 우리 집 벽이란 벽은 다 허물어버리듯 기성을 부린다.

  날씨가 선득해지자 창문을 닫는다. 아니 그 집도 창문을 닫은 모양이다. 여전히 쉴 새 없이 날아오는 재채기는 이제 우리 집 유리창에 와서 붙는다. 유리창이 들썩인다. 유리창떠들썩나비가 창문에 붙어서 날개로 파닥거려대는 것 같다. 팔랑나비과에 속한 유리창떠들썩나비는 너무나 요란하게 풀밭을 날아다니는 바람에 붙여진 이름인데, 날씨가 서늘해지자 이웃집 포탄이 유리창떠들썩나비로 옷 입고 유리창을 때리는 듯하다.

  이 재채기와 한집에서 사는 식구들은 어떠할까. 집안의 물건들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공부하는 학생이 있다면 귀를 틀어막을 것이고, 식구들의 귀도 무관심으로 완전히 돌아선 것일까. 옆집 사정을 생각하다가 사방팔방을 떠들썩대는 유리창떠들썩나비를 또 어떻게 하면 두들겨 잡을까 고민 중이다.

  멀리 있는, 갓 백일 지난 '샛별'이로부터 영상전화가 온다. 샛별이 엄마가 제 딸 자랑이 미어진다. 자기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 같다고, 벌써 말을 하는 것 같다고. 엊그제 뒤집기를 했는데 이제 금방 앉을 것 같다고. 모바일 화면 속에서 팔다리를 잠시도 가만 두지 않고 요란을 떨던 샛별이가 갑자기 으앗! 으앗! 하더니 재채기를 폭발한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엄마, 우리 샛별이 요즘 꼭 이렇게 큰 소릴 내지르며 재채기를 하네! 너무너무 귀엽지?" 샛별 엄마의 웃음소리에 맞춰 나는 기다렸다는 듯 단번에 대답이 튀어나온다. “이~렇게 예쁘고 화통한 재채기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네. 샛별이 재채기 대박! 짱! 짱! 이뿨, 이뿨, 이뿨어어!"라고.

  순간, 유리창떠들썩나비 여러 마리가 그새 창문에 붙어 앉으며 난리법석을 피운다. 이그! 또 시작이다. 우리 샛별이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질의 유리창떠들썩나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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