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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인의 사명 / 이헌구

부흐고비 2021. 2. 7. 20:09

평화로운 시대에 있어서 시인의 존재는 가장 비싼 문화의 장식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인이 처하여 있는 국가가 비운에 빠지거나 통일을 잃거나 하는 때에 있어서, 시인은 그 비싼 문화의 장식에서 떠나, 혹은 예언자로, 또는 민족혼을 불러일으키는 선구자적 지위에 놓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도 군대도 가지지 못하고, 제정 러시아의 가혹한 탄압 아래 있던 폴란드인에게는, 시인의 존재가 오직 국민의 재생을 예언하며, 굴욕된 정신생활을 격려하는 크나큰 축도를 드리는 예언자로 생각되었으며, 아직도 통일된 국가를 가지지 못하고 이산되어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시성 단테는 '오로지 유일한 이탈리아'로 숭모되어 왔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때에, 독일군의 잔혹한 압제 하에 있었던 벨기에인에게 있어서, 시인 베르하렌은 조국의 한 신령으로 추앙되었었다.

우리가, 과거 40년간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 밑에서, 인류가 정당히 가질 수 있는 모든 자유와, 의욕과, 사색과, 행동을 여지없이 박탈당하고 있던 중에서도, 오히려 우리의 시가는 문학의 다른 어느 부문에서보다도 훨씬 생기를 띠고 찬란하여, 예술의 아름다운 경지를 지켜 왔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를 풍요하게 하는, 높은 문화의 생산자이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 2년 전부터, 저들은 민족 문화 말살의 최악의 행동을 전개시키기에 사력을 다하여, 한국 문화 전멸 운동으로 나왔으니, 언론 기관은 폐쇄 당하고, 한글 운동을 탄압되고, 드디어는 창씨 제도라는 인류사에 없는 야만 정책을 베풀어서까지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없애 버리려 들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모든 시인의 붓은 꺾이어지고, 아니, 불타는 정의와 민족애의 시혼은 저들의 칼끝 아래서 저주받고 절단되어 버렸고 오직 일부의 반동적인 문학만이, 불가항력이라기보다 착각된 의식전도로 민족적 불행의 사실을 연출함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8월 15일에 이르기까지의 약 5년간의 혼란기와 반동기에 있어서, 시인들은 오로지 침묵함으로써 웅변 이상으로 우리의 시가와 민족의 정신을 지켜 온 영광의 전사였다. 이제, 우리의 모든 감정과 지혜와 심혼은 해방되었다. 폐쇄되었던 시의 전당의 철비는 일격에 깨뜨려지고 말았다. 우리의 말이 홍수처럼 밀려나오고, 우리의 감상이 조수처럼 부풀어 오르는 자리에서, 시인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 터지는 듯한 흥분 속에 휩싸여졌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에게 준 지옥의 낙형에서 소생하였다.

선정이라고 가르치던 억압에서, 미덕으로 꾸미어 내던 약탈에서, 굴욕을 충절이라고 깨우치려 들던 그 모욕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들은 아름답지 못한 과거를 불살라 버리고, 우리 혈관 속으로 흘러든, 그 불순한 피의 원소를 모조리 씻어 낸 다음, 우리의 심경에 일점의 흐림도 없이, 재생하는 조국의 광복만을 비추어 볼 것이 아닌가? 폴란드의 모든 시인처럼, 단테나 베르하렌과 같이, 우리의 진정한 시혼으로 하여금, 해방의 역사 위에 빛나는 시의 기념탑을 세워야 하고, 유일한 예언자나 신령처럼 숭앙되어야 할 이 땅의 시인들이 아닌가? 시인아, 이제 너는 불사의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선구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이헌구(李軒求, 1905년 5월 12일 ~ 1983년 1월 4일)는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작가이며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작가이다. 호는 소천(宵泉)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제2대, 제3대 공보처 차장을 역임하였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이다. 보성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동아일보』 창간 1,000호 기념 현상모집에서 「별」이 동요·동시 부문에 당선되었다. 1925년 일본 와세다 대학 제1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한 후 일본인 학생들 및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아동문학 및 농민문학 관련 활동을 했다.
1926년에는 김진섭, 이하윤, 정인섭 등 도쿄 소재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함께 해외문학연구회를 조직하는 등, 외국문학도로서의 문예 운동을 시작한다. 1931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는 귀국하여 극예술연구회를 설립하는 등 문예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1932년부터는 『조선일보』 등 지면에서 카프 계열 문인들에 반박하고 해외문학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평론들을 게재한다. 귀국 직후부터 3년간은 보성보육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고,1936년부터는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다 『조선일보』 폐간과 함께 실직했다. 이후 보성중학교장에 취임했다.
광복 후 『민중일보』의 편집인으로 참여하다가 1948년 『민중일보』 사장 윤보선이 공직에 임명되면서 『민중일보』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서도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절필한 경력이 있다. 해외문학파 중심의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한 것을 시작으로 좌익 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주의 옹호 평론을 발표했고, 1949년부터 공보처 차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1957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1973년 예술원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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