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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사람의 나이테 / 최원현

부흐고비 2021. 2. 8. 15:49

안경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안경을 쓴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도 부러웠다. 그렇다고 눈이 나쁜 것도 아닌데 괜히 안경을 쓴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겠지만 설혹 눈이 나쁘다고 해도 안경을 맞출 형편도 못 되던 때였다. 여하튼 안경을 쓴 사람만 보면 그것이 그렇게도 멋져 보였다.

요즘이야 안경이 일반화 되었고, 아이들도 오히려 쓰는 사람이 더 많을 지경이지만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요 축복인가를 알게 될 때가 내게도 찾아왔다. 전혀 예상치도 않게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운전면허 적성검사일이 되어 면허시험장에 가서 시력검사를 할 때였다. 검안표를 바라보는데 도무지 숫자도 그림도 제대로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형체는 알겠는데 정확히 무슨 자인지, 어디로 뚫려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물먹은 달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짙은 안개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뭔가 씌워져 있는 것도 같았다.

2.0에서 1.5를 자랑하던 시력이었다. 그런데 0.5도 나오질 않는 것이다. 면허증 발급이 안 된다고 했다. 병원으로 달려가 검사를 했더니 백내장이란다. 바늘구멍만한 게 중앙에 버티고 있어서 물체를 정확히 볼 수 없게 한단다. 결국 바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인공수정체로 바뀌었다. 나머지 한 쪽도 1년 후쯤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상당히 오래전부터 증상이 보였었다. 특히 운전을 할 때 터널을 통과하려면 반사된 불빛에 눈을 뜰 수가 없고 앞을 바로 볼 수도 없었다. 또 밤에 운전을 하게 되면 더 불편했었다. 그러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 버렸던 것이다.

수술을 하고 나자 보이기는 잘 하는데 양쪽 눈의 시력이 서로 맞지 않아 초점이 모아지지 않아서인지 한 쪽 눈이 나도 모르게 찡그려지는데다 물체가 겹치기로 보였다. 멀리 바라보이는 물체가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그래선지 눈도 머리도 아팠다. 초점을 모아주는 일을 안경이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의 여지없이 안경을 쓰게 되었다. 문득 어린 날 그토록 안경을 쓰고 싶어 했던 것이며 안경 쓴 사람을 부러워했던 일이 생각나 홀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데 안경을 쓰게 된 나의 모습은 전혀 내 모습이 아닌 것 같았다. 왠지 차갑고 매서워 보였다. 거기다 안경이 걸리는 귀바퀴가 아파 오고 코에 닿는 부분에선 땀이 나 쓰리기까지 했다. 기온이 조금만 차이가 나도 성에가 끼어 안경알이 부옇게 되고 눈물이 튀어 금방 안경알이 더러워졌다. 안경을 벗으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고, 쓰면 너무나 불편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쪽 수술을 마저 하면 좀 나아지겠지 했다.

하지만 나의 그런 기대조차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한 쪽 눈의 수술을 마저 해도 각기 다른 시력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었다. 다시 거기에 맞게 안경을 맞추고 가까운 곳을 보기 위해 돋보기까지 하나 더 해야 했다. 안경을 한 개도 아니고 두 개를 써야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 네 개의 안경을 갖고 있다. 사무실에서 쓰는 것, 평상시 쓰고 다니는 것, 집에서 써야 할 것 등으로 늘 안경을 챙겨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안경을 쓴 멋진 모습이 아니라 애물단지가 되어 내겐 너무나도 불편하기만 한 안경 쓰기인 것이다.

전철을 타고 가다 안경 없이 책을 읽고 있는 노인들을 보면 부러움 이상의 신기한 생각마저 든다. 해서 ‘그냥도 잘 보이세요?’ 하며 묻곤 한다. 눈이 약하여 찬 바람만 쏘여도 충혈이 되긴 하지만 시력만은 자신 있었는데 돋보기가 없으면 가까운 작은 글씨를 볼 수가 없고, 먼 곳은 먼 곳대로 안경을 써야만 제대로 볼 수 있는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이를 누구 탓으로 돌릴 수 있으랴. 문득 ‘건방 떨다 꼴좋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붉어진다.

지금은 아니 계시지만 L 교수는 우리나라 심장내과의 최고 권위자였다. 전국에서 그분의 진료를 받기 위해 환자가 몰려들었다. 심장은 곧 생명이다. L 교수의 권위도 그만큼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그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한데 어느 날 엄마와 함께 병원에 있던 어린아이가 L 교수의 안경을 보았나 보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하는 말이 알도 없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 엄마는 무슨 소리냐며 아이를 나무랐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어디론가 나갔다 한참만에 돌아와서는 분명히 L 교수의 안경에는 알이 없다는 것이다.

L 교수는 알이 없는 안경, 그러니까 안경테만 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너무도 유명한 그가 알도 없는 가짜 안경을 끼고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수없이 마주치고 얘기를 나누었으면서도 한 번도 알 없는 안경을 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L 교수가 안경을 벗어버린 모습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안경을 안 쓴 그의 얼굴은 전혀 다른 모습일 것 같았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속아 살 때가 많다. 자기 기준, 자기 지식, 자기 판단에 자기가 갇혀 사실을 왜곡시킬 수도 있고, 잘못 알 수도 있음이다. L 교수는 어떻게 해서 알 없는 안경을 쓰게 되었을까? 자신이 그렇게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안경을 써보라고 했을까? 그러나 내가 판단할 때 L 교수는 분명 안경을 쓴 모습이 안 쓴 모습보다 훨씬 좋다. 멋있다. 품위도 있어 보이고, 권위도 있어 보인다.

나는 전에는 안경을 쓴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는데 지금은 오히려 안경을 안 쓴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뿐아니라 너무 불편하여 가급적 크게 불편함이 없을 때는 벗고 지낸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땐 안경을 쓰고 있고, 어떤 땐 벗고 있으니 혼란이 오기도 하나보다. ‘안경 안 썼어요?’ 하거나 ‘언제부터 안경을 썼어요?’ 한다. 안경 하나가 사람을 전혀 다르게 보이게 하나보다. 하지만 한 편 생각하면 내가 조금 빨리 안경을 썼다 뿐이지 어차피 내 나이쯤엔 다들 돋보기를 쓰고 있으니 그리 억울해 할 일만도 아닐 것 같다.

이제는 뜨거운 감자처럼 놓아버릴 수도, 그렇다고 운명처럼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만도 없게 된 나의 안경 쓰기는 앞으로의 내 삶만큼이나 신경이 쓰이게 될 것 같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돋보기로 바꿔 써야하고, 평상시에도 안경을 써야 하는 내 모습을 중학생 때의 내 친구들이 본다면 내가 안경 쓴 친구를 부러워하고 멋있다 여겼던 것처럼 그들도 그리들 생각해 줄까. 아닐 것이다. 그렇고 보면 어줍잖은 모습의 내 안경 쓴 모습만큼 지금 내 삶도 그런 것은 아닐까? 삶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것도 시력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불평 말고 순명하며 살아갈 일이다.

이제 안경은 삶의 나이테가 되어버렸다. 머리가 하얗게 되어가고, 목소리가 변하고, 주름살이 늘어나는 것처럼, 안경 쓰기도 그중 하나같은 사람의 나이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삶의 나이테가 살아온 날들에 대한 훈장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이라면 정직한 나만의 표시가 아니랴. 앞으로 얼마나 더 나이테를 더해 갈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변화도 조물주가 인간에게 내리신 자연의 질서요 법칙일 것이다.

흐려진 안경을 닦는다. 닦는 김에 돋보기도 꺼내 닦는다. 가까운 것을 보는 돋보기, 먼 곳을 보는 안경, 그렇게 내 삶의 창 아니 내 나이테를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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