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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시간의 강가에서 / 최원현

부흐고비 2021. 2. 8. 12:27

기차 안에서 계절의 바뀜을 본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허허롭지만 벼를 베어낸 자리에선 새 움이 돋아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동그마니 벌판에 남아있던 볏짚들의 마지막 가을 햇볕 바라기가 한가롭다.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무와 배추들, 잎이 몇 개만 붙어있는 나무들, 여직 황금빛 열매를 달고 서 있는 감나무, 가끔가다 보이는 까치집, 가을은 가다 말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겨울은 아주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언덕배기에선 억새꽃이 하늘거리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선 저마다의 빛깔들이 자기를 지키고 있는 것 같다.

해마다 이맘쯤이면 나는 앓곤 했다. 가을과 겨울,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시점에선 내 바이오리듬도 중심을 잃는다. 그러나 정신은 맑아지는 걸 보면 어떤 힘이 겨울나기를 할 수 있나 시험해 보는 듯도 싶다.

아침에 출근하다 보니 어제까지도 싱싱하던 토란잎이 밤새 내린 된서리에 말라 시들어버렸다. 토란이 견딜 수 있었던 한계 온도는 얼마였을까. 그 한계를 못 이기고 저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식물이고 사람이고 삶의 고비가 있기 마련일 텐데 식물은 그 고비를 못 이기지만 그래도 사람은 그걸 이겨내는 것 같다.

나는 지금 가을빛과 겨울빛을 함께 받고 있다. 초추의 양광이 보듬듯이 대지에 내리던 날 우리는 풍성한 계절의 보은에 보람과 기쁨으로 한껏 환호했었다. 그러나 이제 초겨울의 여린 빛을 좇아 따스함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가을빛은 사람을 불러내지만 겨울 빛은 안으로 들어가라고 종용하는 것 같다. 허나 가을빛은 가는 빛이고 겨울 빛은 오는 빛이다. 가을에 비하면 차갑고 어두운 빛이지만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받아들여야 한다.

하늘에 하순 달이 허였게 떠있다. 그래 저 빛이 가을빛 겨울빛의 혼합된 빛일까. 겨울을 맞는 마음이 유난히 조심스러워진다. 길가 남은 저 은행잎마저 하나 없이 지고 나면 세상은 온통 겨울빛이 될 건가. 그런데 나는 새삼스레 이번 겨울 앞에선 이리 떨고 있는가.

시인의 나라


낙엽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이내 쓸쓸해진다. 산과 하늘의 숨결들이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만 같다.

삶은 거리란 생각이 든다. 사람과 사람,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 그 거리가 바로 바람이 다니는 길이요, 비가 내리는 공간이요, 사랑과 희망이 사는 곳이었다. 거리는 서로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나와 별, 아침과 저녁을 이어주고, 태어남과 돌아감을 분명히 해 준다. 낙엽은 그런 순리를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서럽게도 슬프게도 아쉽게도 하고 안타깝게도 한다. 그래 거리란 늘 안타까움일 수 있다.

낙엽이 땅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리를 가장 좁히는 순간이다.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 모든 살아있는 것은 이 하나까지 거리를 갖기 마련이다. 그래서 낙엽이 지는 가을은 서러운 가슴들이 안길 수 있는 품이기도 하다. 맘껏 실컷 울어버릴 수 있는 커다란 품, 그러고 나면 아픔도 얼마큼 가시고, 세상의 이치가 깨달아지고, 아쉬움도 많이 사라진다.

낙엽을 보고 있으면 이내 시인이 된다. 가슴에 내려앉는 지난 시간들의 기쁨 슬픔 아픔 행복 평안, 그것들이 하나씩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시가 된다. 세상은 시가 사는 나라다. 사람들이 용기를 얻고 희망을 얻고 무언가 해야겠다는 의욕을 갖는 것도 시다. 희망이요 생명이요 꿈으로 사람들은 그렇게 시인이 된다. 낙엽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돌아감의 진리를 명쾌히 알려주면서 살아있음의 기쁨과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모두들 시인이 되게 하여 시인의 나라를 만든다.

슬픔 속에서 기쁨의 싹을 찾아내고, 절망과 아픔 속에서 감사와 사랑의 씨를 틔우는 시인의 나라, 아픔과 절망과 후회가 더 많은 삶이라면서도 낙엽의 수만큼 저마다의 가슴에서 시를 키운다. 겨울로 가는 마차를 타고 우리는 희망과 기쁨과 보람의 씨를 품고 시인의 나라에 들어간다.

겨울 강가에서


흐르는 강물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비로소 가야 할 길을 찾은 것 같은 안도감에 긴 숨을 내쉬게 된다. 강물과 같은 방향으로 따라 걷다보면 어느덧 나도 강물과 하나가 되어 있다. 그런 강물을 보고 있으면 지난 시간도 맞이할 시간도 전혀 문제될 것 같지 않다는 평온함이 가슴 안에 가득 찬다.

흐른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있음인가 죽어있음인가. 살아있다면 강물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의 의지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음일까. 그러나 강물은 그저 흐름에 맡길 뿐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흐른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함이요, 질서요, 순응일 것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흐르지 못하는 강을 보는 것 같다. 계속 물이 불면 어디론가 생각잖은 곳으로 넘쳐 버리거나 어딘가가 터져버릴 것이라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막힘 투성이, 막힘은 부자연함이요 반 질서요 거역이다. 내재된 아픔이나 슬픔이 돌출구를 찾지 못한 채 감금된 상태이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 것인지 방향을 찾지 못함이다.

삶은 흐르는 강물 같은 유연함과 질서를 가질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겨울강가, 잎을 떨쳐버린 나무들이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겨울 강가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런데 사람들만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뜻한 대로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하나보다. 하지만 순리를 따라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나도 무언가 잘못하고 있음을 깨닫고 만다. 자연스럽지 못한, 순리에서 벗어나 있는 나를 본다. 그래서일까. 겨울 강가에 서서 흐르지도 못하고 발이 묶여 있는 나를 본다.

만남 그리고 헤어짐


12월은 유난히 행사가 많은 달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만나게 되는 사람들도 많게 된다. 너무들 바빠 쉽게 만날 수 없었던 사이들이다. 그래서 오랜만의 이런 만남은 더더욱 반갑고 그만큼 하고 싶은 말들도 많다.

문학 행사가 있었다. 외국에 계신 분들까지 참석을 했다. 그런데 그냥 헤어지기가 아쉬운지 몇이 자연스럽게 다시 모였다. 날이 새면 떠나야 할 고국, 고국에서보다 떠나 산 세월이 더 많은 사람들, 그들은 고국을 떠나 사는 삶이란 집과 직장과 시장, 세 곳만을 오가는 삶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문학이란 이름으로 서로 모임의 계기가 많은 문인들을 부러워한단다.

얘기를 하다 보니 훌쩍 12시를 넘기고 1시가 되어있다. 만남은 헤어짐의 시작, 만나는 순간 이미 헤어짐을 생각해야 하는 게 삶이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늘 호탕하고 대범해 보이던 k 작가가 오늘따라 여린 마음을 보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그곳이 고향이 된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고국이 더 좋은가 보다.

12월은 가고 옴, 보내고 맞이함이 함께 사는 때이다. 그래서 만감이 교차한다. 다 벗어버린 나목에 대롱이 매달려 있는 이파리 하나가 나인 것 같기도 하고, 한강 고수부지 바람 찬 나뭇가지에 걸려 나풀대고 있는 찢어진 연이 나인 것 같기도 한 때, 그래서 마음이 슬퍼지고 뭔가에 쫓기듯 조급함으로 가슴이 콩닥대는 때가 바로 이맘때인 것 같다. k 작가에게 메일을 보냈다. 바로 수신확인이 된다. 벌써 도착했음이다. 다시 그쪽 사람들과 부대끼며 삶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즐거운 싸움이란 없지만 싸워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그들의 삶을 얻어내야 한다.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던 그와 우리, 그렇다면 헤어짐은 역시 다시 만남의 기약이 아닐까. 문득 남편 목사의 7주기를 맞으며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갈 날이 한 해 더 가까워졌습니다.’ 하던 g 교수의 고백이 12월의 가슴을 가득 채워버린다.

지금 우린 무엇에 얼마큼 가까워지고 있을까. 누구와 헤어지고 누구와 다시 만나려 하는가. 새삼 가까이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어우름의 삶


겨울 날씨는 실제 온도보다 느껴지는 마음에 따라 더 좌우되는 것 같다. 일기예보를 들으며 많이 춥겠다고 해서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가면 그렇게 추운 것 같지 않고, 그렇게 춥지 않을 거라고 해서 그리 준비하고 나갔다가 상당히 곤욕을 치렀던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바깥에 일이 있어 나갔는데 바람이 제법 차갑다. 날씨가 춥지 않을 거라고 해서 비교적 가볍게 나간 차림이다. 그러나 원래 몸에 열이 많은 나는 오히려 상쾌함을 느낄 만큼 지낼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나를 보는 다른 사람들에겐 내가 몹시 추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이란 내게 맞게 입는 것이지만 남의 이목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맘대로, 내 편한 대로, 내 식대로 하고만 산다면 그는 이미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제1 조건을 위반한 셈이리라. 다들 두터운 겨울 옷을 입고 있는데 나만 너무 가벼운 차림인 것이 짐짓 계절에 맞지 않게 옷을 입은 것 같은 부자연스러움으로 느껴졌다.

삶이란 어우름일 것이다. 나와 너, 그리고 우리로 서로 어우르며 사는 것 그게 삶이고 그렇기에 나를 생각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같이 생각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예의고, 질서고, 조화이리라. 그 속에서 함께 사는 맛을 느끼고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정을 느끼게 됨이다. 아무리 두터운 옷을 입어도 속이 비면 추위를 많이 느끼는 것처럼 이 겨울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넉넉함으로 내 속을 채워서 서로의 따스함으로 넘치는 아름다운 어우름의 삶을 만들었으면 싶다. 겨울 날씨는 추울 수밖에 없지만 겨울은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훈훈한 열기를 나눌 수 있는 계절이 아닐까.

아름다운 들러리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눈다면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나선다는 것은 매사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면에서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런다면 오히려 큰 혼란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나서길 좋아하는 사람보다도 묵묵히 뒤에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세상이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러면서도 자기 일을 멋지게 해내는 사람들, 세상은 이들이 있기에 이만큼 유지되는 것이리라.

나는 ‘들러리’란 말을 참 좋아하는데 일상에서는 별로 좋게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 ‘들러리’란 서양에서는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입장하는 것을 도와주고 신랑 신부의 옆에 서는 사람을 말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주된 인물 주변에서 그를 돕는 인물’을 얕잡아 이르는 말로 통용되어 사실 기분 좋게 들리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 들러리야 말로 아름다운 조연이다. 빛나는 주연을 만들어내는 조연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 아니 대개의 경우 주연만을 원하지 조연을 원하지는 않는다. 주연만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작 삶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은 조연이 아닐까.

축구경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득점을 하는 선수에게 쏟아지는 열광적인 환호에는 가장 값진 어시스트로 기회를 만들어준 수훈자가 있음을 잊는다는 것이다.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을 무시해 버린다면 조연의 가치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성공 뒤에는 헌신적인 뒷받침이 있었던 것을 많이 보면서도 그걸 자꾸 잊게 되는 것이다.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은 훌륭한 작가가 있었기 때문이듯 그건 작품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공이지 작품의 공은 아니잖는가. 그러나 나 역시 누군가의 들러리나 하라고 하면 좋아하진 않을 것이다. 빛도 없이 소리도 없이 누군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러니 들러리를 즐겨하고 들러리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사회도 모임도 건강하고 건실해 지는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나는 언제쯤이나 성숙한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134번째 이온겸의 문학방송 [최원현 수필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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