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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어머니의 텃밭 / 구활

부흐고비 2021. 2. 11. 11:37

늦잠을 즐기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애비야! 게일인지 케일인지 때문에 감자농사 망치겠구나. 그놈의 큰 키가 감자를 크지도 못하게 하고, 거기서 옮겨 붙은 진딧물이 감자 잎을 말리는구나.”

느닷없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예, 알았어요.”

대답하고는 늦잠의 혼곤함에 취해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 게으른 하품을 앞세우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가 초봄에 심어둔 감자 몇 포기에 그늘을 드리웠던 죄로 잎이 무성한 케일들은 송두리째 뽑혀서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벌을 서고 있었다.

녹즙식물인 케일의 진가를 모르고 감자의 순수한 맛만을 알고 계시는 어머니가 약간은 원망스러웠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고 뽑혀진 케일들을 빈 땅에 다시 심고 물을 듬뿍 뿌려 주었다.

지난 겨울 친구에게서 얻어온 케일 씨앗을 볕이 잘드는 창가에서 싹을 틔울 때도 “케일은 녹즙을 짜서 먹어도 좋고 쌈을 싸먹어도 좋으며, 더욱이 시중 시세는 상추 따위의 몇 배에 가깝다”는 것을 쉽게 알아듣도록 설명 드린 적이 있었다.

“세월이 바뀌더니 별별 것이 다 나왔구나. 아무리 비싸더라도 초여름 상추맛에 견줄 바며, 거름 안한 애기배추 쌈맛에 비길려구.”

어머니는 당신이 모르시는,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맛보지 못한 채소는 케일 아니라 금잎이라 해도 인정을 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오로지 마음속에는 고향의 텃밭을 무성케 했던 상추 배추는 물론 실파, 아욱, 부추, 토란 등속만이 진짜 채소라는 완고함이 “아따 마아 치워라”는 말씀 속에 깊이 서려 있었다.

우리집 옥상에는 대여섯 평 남짓한 텃밭 겸 화단이 있다. 팔순을 바라보시는 어머니, 항상 고향의 흙내음을 못잊어 하시는 당신의 잃어버린 추억을 떠올리는 장소로는 안성맞춤인 곳이다.

시골에서 태어나 거의 한평생을 농사일에 매달려 왔던 어머니가 장남인 나의 직장을 따라 도시로 옮겨 오신 지가 이십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겨울철 이른 아침의 김서리는 두엄냄새를 잊지 못하시고 애환 서린 가난 속의 추억을 잊지 못하신다.

도시에서도 여러번 변두리 전셋집을 전전할 때도 집 주변의 빈 땅을 놀리는 것이 아까와 상추랑 실파를 심어 ‘노동의 댓가와 흙의 선물이 이렇게 식탁을 풍성하게 한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설명하시곤 하셨다.

3년 전 이 집을 지을 때 어머니는 “애비야! 옥상에 부드러운 흙을 한 트럭만 올려다오. 작은 화단이라도 만들어 채송화도 심고 접시꽃과 맨드라미도 심어 봐야겠다.”며 나름대로의 꿈을 펼쳐 보이셨다.

공사가 끝나기 전 여섯 트럭의 흙을 인부들의 등짐으로 져올려 나무를 심어도 뿌리가 견딜 만한 기역자 화단을 만들어 “어머니! 고향의 텃밭을 옥상으로 옮겨 왔습니다.” 하고 자랑스럽게 바쳤었다.

“안 그래도 상추밭 하나쯤 갖기를 소원했는데 이제야 꿈을 이뤘구나.”

어머니는 옥상 텃밭을 소유하고부터 종묘상으로 나다니시며 푸르른 채소밭으로 가꾸기 위해 온갖 씨앗들을 사오셨다.

이곳은 화단, 저곳은 텃밭이라 정했던 마음의 결정은 추억 속에 살고 싶은 어머니의 진한 갈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고, 텃밭은 이내 화단을 잠식해 버리고 말았다.

옥상 텃밭은 날로 쇠잔해 가고 있는 어머니의 건강으론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상추, 배추, 외에도 숫자상으론 몇 포기에 불과하지만 실파, 우엉, 오이, 머구, 가지, 고추, 마늘, 호박, 돈냉이, 심지어 감자까지……

화단을 조성할 때 심었던 장미 두어 그루와 목련 한 그루, 그리고 석류 한 그루는 이들 채소밭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듬성듬성한 모습이 외롭기까지 하다.

바꿔 말하면 어머니의 꿈의 영토가 그만치 확장된 셈이다. 그 꿈의 영토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고향과 추억은 더욱 가까이 다가와 곤혹스러운 도시생활을 잠시나마 잊고 계시는 것 같았다.

해동이 채 되기 전인 3월 초부터 “애비야! 비닐하우스를 만들어야겠으니 어디서 대나무를 좀 구해 올 수 없겠느냐.”는 말씀이 계셨다.

차일피일 미루면서 끝내 봄이 오도록 하우스용 대나무를 구해 드리지 못했는데도 동리 곳곳에서 주워온 나무막대기를 얼기설기 걸쳐 간이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일찍 상치씨를 뿌린 덕택에 어머니의 텃밭은 여느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른 봄이 머무는 곳이 되었다.

이어 열무와 배추씨가 뿌려지고 실파의 여린 순이 융단처럼 돋아나더니 금새 부추밭의 새순들이 파릇파릇해져 텃밭은 푸른 환희의 색깔로 변해갔다.

작은 텃밭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를 결정하기까지 어머니께서는 몇날 밤의 잠을 설쳤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실리를 따지자니 추억에 미치지 못하고, 아욱 같은 추억의 작물을 심자니 실리에 미치지 못해 결국 감자를 심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다른 모든 채소들이 반찬거리임에 비해 뿌리 열매인 감자는 찬거리 겸 식량대용으로 충분했기 때문에 옛날부터 어머니의 감자종사는 벼농사 다음 가는 중요한 농사였다.

삼십대 초반에 남편을 잃고 청상이 된 어머니의 젊은날은 그토록 가난했고 삶은 감자로 점심을 대신해야 했던 인고의 나날이었다.

그러니까 옥상 텃밭에 다시 심은 감자를 두고 지나간 시절의 쓰리고 아팠던 가난의 상처를 감추기보다는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보상받으시려는 보상심리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억 속의 작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케일을 뽑아버린 감자밭 앞에 서 있노라니 어머니의 어린 아들이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문득 떠올라 한참동안 망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백 평 실히 되는 시골집 앞 감자밭에 씨를 넣기 위해 꼬마 친구들을 불러 왼종일 밭을 일군 뒤 몸살로 몸져 눕던 일, 흰감자, 자주색감자를 무더기로 추수하여 가마니에 퍼담던 즐거움, 햇빛에 드러난 감자알 푸른 부분의 아린 맛, 논매기철에 자주 먹던 멸치를 함께 넣은 감자조림의 맛은 잊혀진 미각이지만 아직도 혀 끝에 생생히 남아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내고 젊은 날을 도시에서 낑낑대며 살아온 내가 늙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어머니처럼 옥상 텃밭에서 감자나 가꾸며 “애비야! 나를 고향으로 가게 해다오.” 하며 농촌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란 아이에게 졸라대는 미래의 자화상을 상상해 보니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쳐왔다.

어머니가 손수 심은 감자 몇 포기가 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추억을 이토록 그립게 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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