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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그리고 나 / 한형주

부흐고비 2021. 2. 16. 13:24

숫자와 사람의 운명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2'라는 숫자가 평생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벌써부터 의식하며 살아온 나는 때에 따라 '2'자에 관련된 여러 가지 생각들을 곰곰이 하게 되었다.

나의 생일은 1928년 2월 22일이고 음력으로 2월 2일이다. 나는 3남 2녀 형제중 2남으로 태어났다. 현주소는 서울시 성동구 옥수동 220번지 한남하이츠 아파트 2동 1002호. 전화번호는 297국번에서 얼마 전에 2297국번으로 앞에 '2'자가 하나 더 붙었다. 나는 28세 때 2세 아래인 아내를 맞아 결혼하였다. 아내의 생일은 12월 11일이고 음력으로는 10월 22일이다. 그러나 어찌된 연유에서인지 혼인신고 하는 과정에서 12월 12일로 둔갑하였다. 누가 그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따지고 정정하려는 마음도 있었으나 그것도 '2'자와 공생하는 나와 결혼한 탓으로 돌려 그냥 두기로 하였다. 몇 년 전 거래하는 은행에 대여금고를 설치하였더니 그 번호의 네 자리 숫! 자중 '2'자가 3개 끼여들었다. 다시 한번 놀랐다. 나의 군번(軍番)은 215614, 의사면허증 번호는 1721 어김없이 '2'자가 끼여 있다.

'2'라는 숫자는 일견 특별한 의미도 지니지 않고 평범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좀더 생각을 넓히면 이 세상의 이치가 음양(陰陽), 자웅(雌雄), 낮과 밤, 해와 달, 하늘과 땅, 미래와 과거 등 서로 대비되는 2개로 나뉘어 그 속에서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신비롭다 하겠다. '1'자는 일등, 으뜸, 하나 등 감각적으로도 돌출하는 화려한 인상을 풍긴다. '3'은 3세 번이라 하여 어떠한 일에 실패해도, 남에게 죄를 지어도 두 번까지는 묵인하고 용서받을 수도 있으나, 세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면 용납치 않는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즉 '3'에는 많다는 뜻도 내포된다. '2'는 여기에서 중간자(中間者)가 된다. 하나는 외톨이라 외롭다. 둘은 서로 의지하니 마음이 놓인다. 셋은 짝지을 때 하나가 남아서 불편할 수 있다.

어렸을 때 또래의 친구들과 시골의 밤길을 걸으면서 서로 앞서기를 꺼렸다. 말로만 듣던 도깨비나 귀신도 무서웠고 호랑이나 구무여우가 나타날까 두려웠다. ! 앞에 서면 그들과 먼저 마주칠 것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꽁무니에 뒤쳐진 아이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뱀이 쫓아와 뒷다리를 물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발과 무릎이 앞으로 튀어오르는 달리기 준비운동 같은 괴상한 걸음으로 앞사람에 바싹 따라 붙었다.

"내 뒤에 땅꾼!", "내 뒤에 땅꾼!" 큰소리로 연신 따라올 수 있는 뱀에게 겁주는 말을 외쳐대면서.

학교 다닐 때 학업성적이 빼어나 일등을 하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고 그 아이는 만족스럽다. 그러나, 마음속에 불안이 도사리게 된다.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마음을 편치 않게 하는 것이다. 반면 성적이 너무 뒤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제대로 대접도 못 받는다. 따라서 만사에 자신을 잃고 비굴해질 수 있다.

이 나라에서 제일 지체가 높은 자리는 대통령이다. 그러나 제일 높다는 그 직책에 안주하여 타성과 독선과 교만에 빠지고 그 결과 비참한 말로를 맞는 경우를 우리들은 볼 수 있었다. 비단 대통령만이 아니고 모든 분야에서 제 1인자라는 칭호에는 음으로 양으로 많은 고통과 불행의 함정이 도사리게 된다. 그런 뜻에서도 2인자나 중간자의 위치가 편할 수 있다.

돈에는 마(魔)가 낀다. 만석(萬石) 가진 자에겐 만 가지 고민이 따르고, 천석 가진 자에겐 천 가지 걱정이 따른다는 말이 있다. 분에 넘치는 많은 재산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분에 맞는 적당한 재산은 소중하다.

인체에 관하여 생각해 본다. 사람의 몸에 있는 중요한 장기는 대부분 2개로 되어 있다. 뇌, 눈, 콧구멍, 귀, 손, 발은 두 개다. 폐장이나 신장도 두 개며, 심장도 한 덩어리 속에 좌우로 각각 심방과 심실이 있으니 두 개라 할 수 있고, 간장도 상하엽으로 나누면 두 개 있다. 이와 같이 두 개가 있는 장기의 어느 하나에 병변이 생겨 병원에서 적출하여도 생명을 유지하는데 지장을 초래치 않는 경우를 흔히 본다. '2'라는 숫자의 고마움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어서 남녀의 성기는 조물주가 하나씩 달아 주셨다. 인색한 처사다. 다른 장기에 비하여 쓸모 없는 기구라고 경시한 처사일까?

추측컨대 남녀에게 성기를 하나만 달아 주었어도 그것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난용하여 걷잡을 수 없는 사건들을 연발하는데, 성기를 두 개씩 달아 주었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상상만 하여도 난감하다.

하나짜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입이다. 사람들은 하나의 입을 가지고도 이 말했다 저 말했다 말을 뒤집기가 일쑤인데, 두 개의 입을 달아 주면 또 하나의 입으로는 자나깨나 말싸움을 일삼고, 저질의 비방과 허튼소리를 거침없이 지껄여댈 수 있으니 이것도 그냥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심사숙고 끝에 둘이면 과하다고 여겨 거침없이 하나로 축소한 조물주의 전능하신 처사에 새삼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노래를 잘 부르는 착한 사람에게 두 개의 입이 달렸다고 가상하면 좋게 쓰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된다. 두 개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화음으로 엮는 멜로디는 듣는 이로 하여금 황홀한 꿈나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미수(米壽)를 지낸 금아(琴兒) 피천득(皮千得) 선생님께서 어느 날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의 2악장을 모은 녹음테이프와 함께 나와 '2'자와의 인연을 염두에 두시고 나에게 주신 신작시 「제 2 악장」을 옮겨본다.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녹아 있는 2악장을 애호하는 은사님의 취향이 반갑고, 무엇보다 따뜻한 은사님의 배려가 가슴 뭉클하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악장
베토벤 운명교향곡 제2악장
브람스 2중협주곡 제2악장
차이코프스키 현악 4중주 제2악장
저, 안단테 칸타빌레
드보르작 「신세계로부터」의 제2악장
그리고 비올라
알토는
나의 사랑입니다.

인생을 그런대로 무탈하게 오래 살다보 니 서기 2000년이 다가온다. 앞으로 3000년은 바라볼 수 없고, '2'자가 선도하는 새 세기와 더불어 노년을 살게 되었다. 과연 '2'자와 나는 사이좋은 벗처럼 끝까지 공생(共生)하고 있다.



한형주(韓炯周) : 1928년 함경남도 신창에서 태어남. 서울의대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학박사. 1968년 「서울대학교 풍토병 연구소」설립. 1971년 월간 『낚시春秋』 창간.
서울의대 외래교수, 한국수필문학진흥회 부회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수필문우회 회원, 한국낚시진흥회 회장, 재단법인 심경문화재단 이사,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 공동대표 역임.
수필집:『魚信을 기다리며』 『八字섬의 메뚜기』 『한형주의 붕어낚시』 『사랑과 미움의 歲月』 『물 같이 바람 같이』 『2 그리고 나』 『세월을 낚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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