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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탈곡사(脫穀史) / 김학래

부흐고비 2021. 2. 17. 14:56

식탁에 오른 밥알의 진실은 알곡, 곧 곡식이다. 곡식은 수확된 농작물에서 탈곡한 것인데, 이 알곡을 추스리는 일을 타작이라고 하였다. 인류 역사에서 타작(탈곡)의 변천 과정을 더듬어 보는 것도 인류 발달사를 살펴보는 한 단면일 것 같다.

다 익은 곡식에서 알곡을 얻는 최초의 방법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 손바닥으로 부벼서 알곡을 골라내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원시인들이 이런 방법으로 알곡을 골라 생식하였을 것 같은데 나의 추리가 맞는지 모르겠다.

나는 소년 시절 농촌에서 자라면서 보리통금과 콩통금이란 서리를 해본 일이 있었다. 5월 중순경 보리밭이 누렇게 물들어질 무렵, 계곡이나 언덕 아래 으슥한 곳에서 풋보리를 꺾어다가 모닥불에 익힌 후 불에 탄 새까만 보리 모가지를 손바닥으로 부비면 뜨끈뜨끈한 통보리쌀이 손바닥에 모아졌다. 이 통보리쌀을 입에 넣으면 구수하고 맛이 좋았기에 배가 부르도록 계속 먹었다. 내 어린 시절의 봄은 언제나 춘궁기였으며 보리고개라는 배고프고 어려운 고비였던 것이다.

또 가을이면 콩통금도 재미나게 해 먹었다. 그 당시에는 보리통금과 콩통금을 한다 해서 보리밭 주인과 콩밭 주인이 성화를 내고 쫓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6.25 당시 산속으로 피신했던 어떤 인사들이 여러 날 벼를 훑어 생식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말하자면 이런 방법과 수단이 원시 탈곡법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다음 탈곡법은 아마 후려치는 방법이었을 것 같다. 익은 벼 포기를 벽에다 후려치면 벼들이 떨어질 것이다. 실제로 수수 모가지를 방안에서 두들기는 타작 상황을 본 일이 있다.

그 다음 탈곡법은 몽둥이나 막대기로 두들기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콩을 수확한 후 잘 말려서 멍석 위에 늘어놓고 작대기로 두들기면 콩알이 우수수 떨어진다. 참깨 나무를 모아놓고 두들기면 깨가 쏟아진다. 참깨 농사를 잘한 후 수확을 하고 타작을 할 때에는 어린 애기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해야만 손실을 면할 수 있다. 소중하고 귀하고 값비싼 참깨알이 쏟아지는 기쁨이 얼마나 좋은 것이기에 사람들은 금슬이 좋은 신혼부부들의 행복 치수를 깨가 쏟아지는 것에 비유하는 것일까? 수수나 깨와는 달라서 보리 모가지에서 보리쌀을 얻어내는 타작법으로는 몽둥이로 내려치는 방법이 있었다.

다음으로 도리깨 타작법을 들 수 있었다. 도리깨란 긴 장대 끝에 대나무 살들을 부착하여 장대를 휘두를 때 대나무 살들이 보리집이나 콩단을 사정없이 때리는 농기구다. 도리깨 타작법은 최근까지도 산간벽지에서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혼자서도 도리깨질을 하지만 옛날에는 서너 명의 장정들이 농요를 부르면서 재미있게 두들기는 것이 상례였다. 농요를 부르기에 흥을 돋을 수 있고 리듬감이 있기에 도리깨끼리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 그 농요의 가사를 잘 모르지만 ‘옹해야! 옹해야! 어쩔시구 옹해야!’ 이런 것인 줄 알고 있다.

타작법의 다음은 훑태를 써서 벼나 보리 모가지를 훑어내는 방법이었다. 벼를 훑태로 훑으면 알곡이 쏟아지지만 보리 모가지는 다시금 두들기거나 쳐야만 보리쌀이 되었다. 그러기에 기계로 보리타작을 할 때에도 보리를 친다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보리 탈곡의 경우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보리집을 송두리째 집어넣는 기계가 있었으며 추려진 보리 모가지를 넣고 타작하는 기계가 따로 있었다.

벼훑태 다음으로 나온 타작 기계가 탈곡기였다. 발로 밟으면 웽 웽 비명을 지르면서 탈곡 원반이 돌아가고 볏단을 들이대면 벼가 쏟아졌다. 10분쯤 밟고 나면 땀이 나고 다리가 뻣뻣해지는데 농부들은 이 힘든 작업을 온종일 하였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밟아대는 중노동이었지만 수확 후 알곡을 뽑는 재미로 농부들은 지칠 줄 몰랐다.

요즘에는 탈곡도 기계화되고 현대화되었다. 콤바인이란 기계가 나락밭을 갈고 다니면 벼는 가마니에 담아지고 볏집은 논바닥에 깔리는 것이다. 벼 타작과 보리타작이 이렇게 되기에 옛날처럼 볏단과 보릿단이 집 안으로 들어갈 일이 없다. 볏단이나 보릿단을 지게로 져 나르고 머리로 이고 다닐 일이 아예 없어진 것이다. 농부들이 등짐 때문에 골병들 일도 없고 부녀자의 머리가 벗어질 일도 없다.

마당 한쪽에 나락배눌(낟가리)과 보리배눌이 쌓아질리 없고 타작 후 마당에 만들어지던 두 대(벼를 저장하는 시설)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요즘 현대인들이 옛날의 타작 방법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농업 박물관에 가면 훑내며 도리깨며 탈곡기를 볼 수 있겠지만, 그 용도를 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도리깨질을 하면서 부르던 농부들의 노래와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를 아에 들을 수 없을 것 같다. 식량이 남아돌아가기에 늘 배가 부르고 군것질 감도 많은 오늘의 청소년들이 그 옛날의 보리통금 맛 콩통금 맛을 어떻게 알 수 있겠으며 어찌 감지할 수 있겠는가?

탈곡법이 기계화되었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어둡기만 하다. 수매도 잘 안되고 농산물을 팔아봐야 생산비에 못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좋아졌다는데 농사를 짓는 재미도 보람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보리타작 벼타작을 수동으로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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