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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우화를 꿈꾸다 / 고경서(경숙)

부흐고비 2021. 4. 13. 15:38

강물에 몸을 밀어 넣고 낚싯대를 붙들고 서 있다. 수면은 한풀 꺾인 볕살을 물고기비늘처럼 튕겨낸다. 번들거리는 물속에 잠긴 찌가 입질해오기를 기다리는 낚시꾼들의 표정이 깊다. 자연으로 돌아간 그들의 모습이 날선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하단에는 국지성 호우가 쏟아진다는 기상예보가 자막으로 떴다가 흘러간다. 텔레비전은 플라이 낚시를 방영중이다.

흰 벽을 가운데 두고 나는 거실에서 당신은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본다. 열어놓은 창으로 함부로 살았던 날들을 책망이라도 하듯 소낙비가 후려친다. 매운 바람살도 한 수 더 뜬다. 우리는 빗살무늬토기처럼 틀어박혀 제가끔 축축하다. 널브러진 신문마냥 퍼질러진 마음을 일으켜 허공에 팔을 뻗는다. 손바닥은 빗물을 움켜쥐면서도 눈은 연신 화면을 힐끔거린다. 비 냄새를 맡으며 이 방송, 저 방송으로 채널을 돌려가며 낚시꾼 행세를 하다가 결국 낚시방송에 걸려들었다.

당신은 집짓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지금 이 침묵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생의 급류에 휘말린 이후로 틈만 나면 바둑판에서 집을 만들어간다. 삶이 곧 대국對局이라도 되는 양 두 눈을 부릅뜬 채 안정된 노후를 맡길 거처를 마련하는가. 턱을 괴고 앉아 청춘의 빛바랜 설계도를 내려다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을 터이다. 바둑판 위에 소용돌이가 보이고, 세상을 바꾸려는 의미심장함을 매번 봐왔기 때문이다.

벌써 몇 시간째다.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치열한 싸움터에서 신의 한 수手를 기대하며 흑백의 바둑돌을 바둑판에 옮겨놓는 당신. 아니 희고 검은 징검돌을 심연의 마당 깊숙이 내리박으리라. 백이 완벽한 수비를 펼치고, 흑은 반격할 기회를 신중하게 노리는 묘수일 수도 있겠다. 사활을 건 긴박한 초침소리에 공격과 수비로 포석을 다지면서 방어벽을 쌓는 손등이 스친다. 일을 많이 한 손이다. 섣부르게 밀어붙이다간 파국에 이른다는 훈수에 굳은살 박인 가슴을 쓸어내릴 것도 같다. 여태 집은커녕 옹벽도 세우지 못한 걸까. 딱, 딱, 딱 ……. 바둑알 던지는 소리에 빗줄기가 한 주먹씩 잘려나간다. 삶의 무게로 기우듬해진 당신의 뒷모습이 갈수록 휜 만灣처럼 쓸쓸해 보인다.

오늘따라 빗소리가 산조가락이다. 두어 달 묵힌 감정도 저기압이다. 외로움을 동반한 이상기온에 우울감이 장마전선을 구축한다. 세파에 떠밀려 표류하다 끝내는 침몰하고 마는 게 인생이라는 누군가의 말에 심취해있다. 비 맞는 강변이라도 걸으면서 눈물이라도 뺄까 쉽다가도 그만 둔다. 바보상자 앞에서 멍 때리다보면 얽히고설킨 감정의 실마리가 풀어질까 싶어서다. 굳이 강이나 바다로 나서지 않더라도 뒤엉켜버린 머릿속도 응어리진 마음도 짙푸른 바람을 불러들인다. 혼탁한 물이 스스로 정화되듯 화장으로 가릴 수 없는 목주름이 펴지고, 짓눌러진 가슴도 툭 터져 소통에 들 것이다. 강물이 제 안의 울음소리를 지우면서 바다로 흘러가듯이.

당신은 낚시보다 바둑이 더 좋다고 말했다. 열아홉 줄 반상위에서 투쟁하는 물밑싸움이 현대인의 아귀찬 욕망과 경쟁심을 엿보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다지만 곤고한 삶을 이렇게 에둘러 표현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난공불락에 이르러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전략과 전술을 내세운 승부근성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커졌다. 어쩌다 불운이라는 수세에 몰려 완성된 집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면 줄줄이 끌고 온 길들을 한 수 씩 물려가며 반전의 기회로 삼는 재미에 이끌린다고도 했다. 좌절된 꿈과 희망으로 인한 상실감이 타인에게 이해받지 못하거나 수용되지 않을 때 대마大馬를 잡듯 인생도 정석이 있기를 열망하는 눈빛에서 당신만의 고독이 읽혀졌다.

나는 바둑보다 낚시가 더 매력적이다. 비록 영상이지만 무대가 우선 자연이라는 열린 공간이다. 바둑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빽빽이 그려진 네모 칸막이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옥죄고 구속한다. 세상살이가 힘들 때마다 엄살과 변명으로 몰아붙이는 내게 한 마리의 물고기를 포획하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새로운 여정을 꿈꾸고, 버거운 현실을 견디면서 버텨내는 힘과 자유를 공유한다. 먼 바다로 가는 숱한 지류를 끌어안고, 희비의 여울목에 휘둘리고, 바윗돌에 부대끼는 고초를 겪는 강물처럼 질풍노도의 인생길에서 채우기에 급급했던 욕망을 덜어내고 비워 내다보면 어느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렇듯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주는 낚시질은 나를 감싸고도는 익숙한 감정들이 씻겨 나가기에 웃고 즐기면서 동반자로 삼는지도 모른다.

이제 빗줄기도 한풀 꺾였다. 한눈팔다 잡혔다는 듯 무지개송어가 연신 꼬리지느러미를 휘갈긴다. 강태공들도 길길이 뻗대는 송어를 강물로 돌려보낸다. 한 공간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닮아지는 게 부부이다. 성격과 취향이 서로 다른 남녀가 속울음을 따로 삼키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떨쳐낸다. 물고기를 잡고, 집을 짓는 행위에 연민어린 시선을 주고받다보면 상처는 화해를 모색하고, 삶은 여유를 찾지 않을까. 누에가 컴컴한 고치 속에 틀어박혀 변태를 거치듯 바둑의 승부수처럼 낚시의 묘미처럼 마음의 누수로 찢어진 기억들이 치유되는 순간이 온다. 빗장뼈에서 울컥 치받히는 소소한 갈등을 허무는 이 공간과 시간이야말로 DMZ, 완충지대가 아닐까.

나와 당신, 그리고 텔레비전이 정물화처럼 놓여있는 한 지붕아래서 각자 방 하나씩에 안주하는 이 뜨뜻미지근한 무관심은 뭘까. 전화기조차도 우화偶話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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