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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초설에 붙여서 / 류달영

부흐고비 2021. 4. 16. 08:11

--전진을 위한 회고와 전망--

어느 날 나는 텅 빈 운동장에서 두 팔을 앞뒤로 높이 휘저으면서 혼자 걸어가는 한 어린이를 지나쳐 볼 수가 있었다.

밤사이에 내린 첫눈으로 뒤덮인 운동장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는 햇살에 더욱 눈이 부시었다. 그 흰 눈 위를 생기가 넘치는 그 어린이는 마치 사열대 앞을 행진하는 군인처럼 기운차게 신이 나서 꺼덕꺼덕 걸어가는 꼴이 하도 익살맞아서 나는 혼자 웃음을 참으면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린이는 가끔 그 활발한 행진을 멈추고 차려의 자세로 서서 고개를 돌려 뒤를 한 동안씩 바라보다가 전과 똑같은 보조로 두 팔, 두 다리를 높직높직 쳐들면서 다시 걸어가는 것이었다. 옥판선지 같이 깨끗한 흰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이 자국자국 무늬져서 길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이 어린이는 눈 덮인 운동장을 꼿꼿하게 일직선으로 걸어가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 걸어가다가는 발을 멈추고 서서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어느 정도로 똑바른가를 검토해 보는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 어린이가 걸어간 발자국은 부분적으로는 곧았으나 전체적으로 보면 여러 곳에서 바른편으로 또는 왼편으로 굽어 있었다.

나는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면서 그 어린이의 행동을 통하여 적지 않은 것을 느꼈고, 또 배울 수가 있었다. 사람들은 부귀빈천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누구나 자기들의 일생을 곧고 바르게 걸어가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걸어간 그 생애의 발자취들은 작고 큰 허다한 파란 속에 가지가지의 복잡한 곡선을 그리고 가다가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 영원히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인생은 결국 눈 덮인 들판에 가지가지의 발자국을 남기고 걸어가는 나그네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눈 덮인 운동장 위를 걸어가는 저 어린이가 짬짬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돌려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을 이윽히 바라보는 것은 얼마나 슬기로운 일인가?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증자는 '내가 날마다 세 차례씩 스스로 반성해 본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날마다 일기를 쓰면서 지나간 하루의 생활을 살펴본다. 주말에는 1주일의 생활을, 월말에는 한 달 동안의 생활을, 그리고 연말에는 1년 동안의 생활을 더듬어 살펴보는 것이다. 또 누구나 자기의 생일에는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생활을 어렴풋이나마 되씹으면서 자기의 걸어온 삶의 발자국을 바라보게 된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뚫어보고 스스로 지나온 자국을 살펴보는 일은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자기 자신과 스스로 걸어온 발자취를 때때로 돌아다보지 않고서는 걸어가는 옳은 방향을 찾아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도가 '손에 쟁기를 쥔 사람은 뒤를 돌아다보지 말라'고 제자에게 경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경고는 결코 걸어온 과거를 살피고 되씹어 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뚜렷한 큰 목표를 세운 다음에는 그 목표를 잠깐 동안이라도 놓치지 말고 한결 같이 앞으로만 나아가라는 뜻이다. 눈 덮인 운동장을 일직선으로 걸어가고자 애쓰는 저 천진한 어린이의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 대하여 우리는 그 원인을 검토해 볼 가치가 있다.

저 어린이의 세심한 주의에도 불구하고, 발자국이 곳곳에서 구부러진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저 어린이가 만일 운동장 저편에 서 있는 큰 포플러나무나 또는 전신주를 일정한 목포로 삼고 그것만을 향하여 한결 같이 걸어갔더라면 저 어린이의 발자국의 줄은 매우 곧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어린이는 앞을 향하여 곧게 나가려고 치밀하게 주의를 했었지만은 먼 앞에 움직이지 않는 일정한 큰 목표를 세우는 슬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인생으로서 각각 자기 자신의 한결같은 목표가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하여 가면서, 때때로 지나온 과거를 보살피고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경주장에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달린다고 하더라도 골을 향해서 달리지 않는다면 그 달음질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신의 귀중한 일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는 한스럽다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나'에 있어서 두 가지의 '나'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의 '나는' 물론이지마는, 또 우리라는 사회인으로서의 '나'의 존재를 드시 인식해야 한다. 이것을 '작은 나'와 '큰 나'라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알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인생의 걸음걸이에 있어서 우리는 언제나 '작은 나'와 '큰 나'의 이중의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이 민족이 장구한 역사의 험한 길을 걸어오다가 이제 비로소 세계무대 위에서 살길을 열어 보고자 거족적으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가 '작은 나'로서의 행로의 목표와 회고도 중요하지마는 '우리'로서의 행로의 확고한 목표와 겸허하고 정성스런 회고가 절실히 요청된다. 첫눈이 내린 오늘, 나는 눈벌판을 걸어가던 저 어린이를 더욱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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