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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아호 / 안윤자

부흐고비 2021. 4. 16. 12:51


'소현素賢'은 근자에 이르러 이따금씩 필명으로 써보는 나의 아호다. 어느 지인이 지어주셨는데 휠素에 어질賢으로 "허연 밝은 달빛 같은 어질음이 사방에 퍼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한다. 따라서 나의 운명에 밝은 빛을 더해주고 문운도 빛날 것이라는 부연설명까지 상세히 적어 보내는 친절을 잊지 않으셨다.

이름은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사람 자신을 나타낸다. 예컨대 '안윤자'를 생각할 때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 저절로 내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에게 입력되어 있던 나의 다양한 모습들 ― , 웃는 입 매무새며 말씨며 습관과 성깔머리까지도 동시에 오버랩 되어 스쳐갈 것이다. 이름이 내포하고 있는 포괄적인 이미지 속에는 그 주인공의 얼굴이 활동사진처럼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윤자'는 꼭 '안윤자'처럼 생겨먹을 수밖에 없게 된다.

김춘수는「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꽃은 하나의 의미성으로서 얼굴과 이름이 갖는 상관관계 역시 불러줌, 즉 소리라는 구체적이고도 반복적인 파장체를 통해 불변의 표정으로 각인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연성의 필연화 현상이라고나 할까. 예컨대 내게 아무리 좋은 이름이 있다해도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다면 이름, 그 자체성만으로는 나라는 개체와 어떤 상관관계도 맺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간혹 외양은 별볼일 없으나 이름이 좋아 돋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모는 그럴듯한 고상함과 품격을 갖추고 있어도 이름이 영 받쳐주질 않아 가볍게 치부되는 사람도 없지 않다. 그가 공인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이름자를 골라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운명적으로 부여받게 되는 것이 이름의 타고난 숙명이기 때문이다.

부언하고, 여하간에 자기 이름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나 자신이다. 그 흔하디 흔한 아들 子자가 들어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게다. 순자나 영자(실례합니다)가 되지 않은 것만도 그나마 요행이라고는 생각한다. 그렇다 해도 하필이면 윤자라니! 하다못해 윤혜나 윤주, 윤님이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允자 돌림자에서 조금이라도 세련돼 보이는 자수를 갖다 붙이며 안타까워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미 '윤자'로 고정되어 있는 내 이름을 선뜻 개명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필명을 사용할 수 있는 등단이란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으나 그때는 별 의식 없이 흘려보내고 말았다.

이런 곤고한 심경에 변화가 일었다. 아호를 쓰고 싶다는 바램이 구체화 된 것이다. 본명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고육지책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선배 문인과 예인들이 대작하기를 즐겨했던 아호 사용을 본떠 낭만 같은 속 멋을 이제쯤은 좀 흉내 내본들 인생사에 그다지 큰 결례를 범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배포 때문이다.

살아오는 동안 내게도 이름을 따로 지어 불러주고 싶어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 중 두 개의 아호가 생각난다. 비록 비공식적 명칭이었지만. 그 하나의 이름은 '정밀(靜謐)' 이다. 십여 년 전쯤으로 동해안 여행길이었다. 비어있는 버스 내 옆자리에 자청해 동석한 어떤 남자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내게 아호를 지어주고 싶다고 청해왔다. 긴 여행길의 주고받은 자연스런 대화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급조한 나에 대한 인상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그날 나는 버스 속에서 그와 참 많은 대화를 나눴다. S그룹 직원이라는 나보다 너 댓 살쯤 아래로 보이던 그 사람은 반대로 내가 자기보다 너 댓 살 덜 먹은 노처녀로 착각하고 있는 듯 했다. 어떤 주제에도 막힘이 없던 꽤나 박식한 젊은이였다. 그는 잠시 생각에 몰두하다 '정밀'이란 이름이 내 인상과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어떠냐고 물어왔다. "세밀함"의 뜻이냐? 는 질문에 메모지를 꺼내더니 한자까지 적어주며 집에 도착하거든 국어사전을 꼭 찾아보라고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겨울날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고요로운 풍경"을 연상하고 생각해 내었다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 뜻의 직역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국어대사전을 펼쳐보니 <정밀靜謐 : 고요하고 편안함>이란 단어가 놀랍게도 나와 있었다. 달리는 고속버스에서 보편적이지도 않은 그 정도의 의미를 손쉽게 가려낼 수 있다니. 그에 비해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의 어휘실력이 참말이지 남부끄러운 순간이었다. 그날 마침 한적한 영동고속도로에는 솜털 같은 눈발이 휘휘 날리고 있었다.

도착지인 서울 반포 고속터미널에 다 왔을 때, 그 사람은 헤어짐이 못내 아쉬운지 내게 이름과 연락처를 여러 번 물었으나 나는 끝내 밝히지 않고 돌아섰다. 그후 나의 작품 속에서 하나의 의미로 형상화되곤 했던 '정밀(靜謐)'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그날 그 사람의 지적이고도 선량해 뵈던 인상이 선연해지곤 한다. 지금 다시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눈 내리는 겨울 창가로 이끌고 가서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며 삶을 얘기하고 싶다.

또 하나의 아명은 '여연(如然)' 이다. 불교적 색채가 짙은 이 아호는 선배 문인이신 M선생이 지어주셨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내 모습을 떠올려 생각한 이름이라 했다. 그 뜻이 고마워 감사하게 받았으나 그 아명 역시 인연이 닿지 않았음인지 내 삶에 특별한 의미로 남지는 못했다. 최근까지 전화를 걸어주실 때마다 "여연 선생!" 하고 다감하게 불러주신 M선생께 죄송스런 마음을 갖고 있다.

등단한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럼에도 남들처럼 보란 듯이 필명도 날리지 못하고 외곽만 맴도는 어정쩡한 당위가 나를 부끄럽게 한다. 거저 놀고먹었던 것만은 아닐지라도 이런 저런 분망을 핑계삼아 작품 쓰기에 게을렀음을 변명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치열한 작가정신의 부재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자성에 때맞춰 우연히도 아호 '소현(素賢)'이 내게 주어졌다. 이 시점에서 운명처럼 만난 것 같은 '素賢'은 여태껏은 부재의 존재였으나 나와 지어진 관계를 통해 한 문인의 아명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예로부터 유독 문인들은 아호를 애용했다. 일제 강점기의 곤혹스런 시대상황 속에서도 소월 김정식, 만해 한용운, 춘원 이광수, 이상 김해경 같은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문단의 거장들이 본명이 아닌 아호를 필명으로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선보였던 것이다. 70년대의 청마 유치환 시절까지만 해도 아호 사용은 보편적 흐름이었지만 언제부터인지 문단에서조차 아호로 대작하는 낭인의 멋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꼭 아호를 쓰고 호칭하는 것만이 낭만적 행위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팍팍하기 이를 데 없는 세상살이에서 한 템포 느슨하게 아호로 대작하며 우의를 다질 줄 알았던 선배 문인들의 속 멋과 로멘티시즘이 그립기 짝이 없다.

아직 변변히 함자도 내세우지 못한 연천한 문단의 말객으로서 하찮은 필명 하나를 핑계 삼아 주저리주저리 읊조린 사변을 문단의 선배 제위들께선 강해(江海)와도 같은 인정으로 용서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안윤자 수필가 

가천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어국문학과졸업(현대문학전공),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복지위원, PEN클럽.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저서: 『벨라뎃다의 노래』, 『연인 4중주』 논문집: 『윤동주 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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