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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함백산의 봄 / 김이랑

부흐고비 2021. 4. 17. 09:50

화신花神도 평행선을 따라온다. 남해안에 상륙한 화신은 중앙선 철길을 따라 북진한다. 간이역마다 꽃들을 내려놓은 화신은 영주 벌판에서 갈라진다. 하나는 소백을 넘어 월악으로 가고 또 하나는 영동선을 따라 굽이굽이 깊은 산골로 달린다.

산 첩첩 백두대간 골짜기에 이르러 화신은 다시 둘로 나눈다. 한 갈래는 똬리를 틀 듯 태백준령을 돌아 넘어 동해로 뻗고, 또 한 갈래는 낙동강 발원지 황지고원으로 간다. 황지고원에 집결한 화신은 잠시 멈춘다. 높고 가파른 함백산을 오르려면 전열을 가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출발한 화신은 비탈진 싸리밭길을 오른다. 먼저 복수초가 차가운 얼음벽을 뚫는다. 이어서 매화와 산수유가 여린 폭죽을 뽕뽕 터트리며 적을 교란하지만 역부족이다. 고지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동장군의 저항은 거세다. 화신이 방심한 틈을 타서 공중에서 우박을 퍼부으면 화신의 전열은 잠시 흐트러진다.

동장군의 저항을 밀어내고 진달래가 능선에 붉게 핀다. 이에 뒤질세라 개나리가 양지를 노랗게 물들인다. 슬금슬금 음지로 퇴각하던 동장군은 흰 꼬리를 끌고 골짜기로 숨어든다. 그렇다고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게릴라전에 돌입한 잔당은 느닷없이 나타나 꽃샘바람 불어대고 줄행랑치기를 되풀이한다.

함백산 기슭 추전역杻田駅을 차지하려는 전투는 춘분이 넘어도 이어진다. 낮이면 화신이 따스한 봄바람을 불어대고 밤이면 동장군이 따끔한 싸락눈을 퍼붓는다. 밤낮 가리지 않고 밀고 밀려나기를 달포, 더는 소모전을 펼칠 수 없는 화신은 동장군의 잔당을 토벌할 계획을 세운다. 그 작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다.

삼월 삼짇날 밤, 야음을 틈타 달려온 열차가 속속 도착해 추전역 플랫폼에 특공대를 부려놓는다. 긴산꼬리풀·두메고들빼기·갈퀴현호색·선괭이눈·매발톱·뱀톱·모싯대·노랑갈퀴·층층이꽃·큰까치수염·큰뱀무·노랑투구꽃…, 사나운 이름으로 무장한 특공대는 함백산으로 진격해 두문동재와 만항재를 탈환한다. 여세를 몰아 꼭대기에 깃발을 꽂으면, 그날부터 가을까지 산정山頂에는 별꽃잔치가 펼쳐진다.

새빨간 얼굴에 주근깨가 점점 박힌 깨순이 트리오가 사방으로 나팔을 불어댄다. 옆으로 말나리 아래로 참나리가 꿈결의 재즈라도 합주하는지, 하얀 머리 부스스한 터리풀과 껑충 까칠한 보랏빛 엉겅퀴가 잘 생긴 가문비나무 옆에서 몸을 흐느적거린다. 하늘을 향해 하늘나리가 살풀이 가락이라도 연주하는지, 수수꽃다리 향기 휘감고 도는 언덕에는 고깔을 비스듬히 쓴 광대나물꽃이 연보랏빛 춤사위를 풀어낸다.

봄꽃 잔치에 취해 미치광이풀꽃을 잘못 먹었을까, 벌 한 마리가 붕붕거리며 미친 듯이 허공을 선회한다. 이질에 걸려 밤새 설사라도 했을까, 창백한 나비 한 마리가 둥근이질풀에서 약을 짓고 있다. 때 아닌 낮술 몇 사발에 거나하게 취했는지, 노루오줌풀이 노린내를 솔솔 풍기며 흔들흔들 몸을 가눈다. 내가 호랑이인가 나비인가, 하얀 박하향에 취한 호랑나비가 당귀꽃 위에 주저앉아 해롱거린다.

아지랑이에 아롱아롱 홀리고 꽃향기에 취하면 내가 풀꽃인지 사람인지. 쉬땅나무꽃, 꼬리조팝나무꽃에게 수작을 걸다가 너도바람꽃과 눈이 맞으면 나도바람꽃, 빨간 하트 조롱조롱 금낭화가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면 이 몽환에 가슴도 분홍으로 물이 든다. 쪼그리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면 풀꽃의 윙크에 정신이 그만 아찔해진다.

앙증맞고 깜찍한 꽃다지, 샛노란 점박이 얼굴로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쇠비름, 돌돌 말린 꽃대가 사르르 풀어지면서 방글대는 하얀꽃마리, 오동통한 잎 사이로 노랑별을 뿌려놓은 돌나물, 꽃잎이 노란 바람개비처럼 빙글대는 물레나물, 하늘 향해 좁쌀을 내뿜는 냉이, 대롱 끝에 하얀 별사탕을 피운 쇠별꽃, 올망졸망 방싯대는 금싸라기 은싸라기 웃음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애틋해진다.

별똥별 떨어진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가 핀다. 노루가 오줌을 눈 자리에는 노루오줌꽃이 피고 제비가 똥을 눈 자리에는 제비꽃이 핀다. 장끼와 까투리가 사랑을 나눈 자리에는 꿩의바람꽃이 핀다. 사무친 그리움이 진 자리에는 상사화가 벙글고 애달픈 사연이 깃든 자리에는 찔레꽃이 핀다. 서러움 북받치는 자리에는 눈물꽃이 터지고 기쁨 넘치는 자리에는 웃음꽃이 핀다.

걸음마를 배우기도 전에 산으로 간 아기는 애기똥풀꽃, 시집도 못가고 물로 간 누이는 물봉숭아, 장가도 못가고 산으로 간 삼촌은 미나리아재비로 핀다. 죽은 딸 달래를 안고 죽은 진 씨 무덤에는 진달래가 핀다. 시집살이만 모질게 하다 꽃상여를 타고 떠난 어머니는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를 미워하다 죽은 시어머니는 며느리밑씻개로 핀다. 쌀이 떨어져 탁발하러 간 스님을 기다리다 얼어 죽은 동자의 무덤에는 동자꽃, 딸을 기다리다 죽은 엄마의 무덤에는 족도리풀이 핀다.

피고 지는 사연은 저마다 간절해서 그리움도 꽃으로 피고 서러움도 꽃으로 핀다. 별똥별처럼 이 땅에 소풍 나온 사람들은 슬픔도 원망도 사랑도 다 꽃으로 피운다. 그러고는 죽어서 별이 된다.

 

 

함백산야생화축제

함백산 함백산은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과 태백시의 경계에 있는 해발 1,572.9m의 산입니다. 오대산, 설악산, 태백산 등과 함께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고봉 가운데 하나입니다. 함백산은 조선 영조

www.gogo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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