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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검둥이의 질주 / 박경대

부흐고비 2021. 4. 23. 08:51

화면속의 검은 점 하나가 차츰 클로즈업 되고 있다. 그것은 어느새 흐느끼고 있는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더니 기어이 나의 눈물샘을 건드려 놓는다. 잿빛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고,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서럽게 들린다. 일순 쇳소리를 내면서 불어 온 한 줄기 바람이 추적추적 내리던 비를 흩날리게 부수고 있다. 항구는 온통 슬픔으로 젖어 있다.

삼십 년 전, 야생호랑이를 촬영하기 위하여 인도의 정글을 헤집고 다니던 때였다. 어느 마을을 통과할 즈음 검은 개 한 마리가 달려오더니 차를 따라 붙었다. 도로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옆에서 차를 멈추게 하려는 듯 ‘컹컹’ 짖으며 따라왔다.

조금 따라오다 그만두겠지 하는 나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검둥개는 ‘짜이’를 한잔하려고 길가의 가게에 차를 세울 때까지 무려 3km 이상을 따라왔다. 차가 멈추고 내가 내리자 검둥이의 짖음은 멈추었다. 차의 안까지 훑어보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도로를 향해 돌아앉아 쉬는 것이었다.

‘참 우스운 놈이네’라 생각하며 바깥 자리에 앉아 빵 몇 개와 차 한 잔으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있었다. 검둥이가 빵을 먹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어 한 조각을 던져주었더니 허겁지겁 먹는 것이었다. 다소 야위어 보여 먹을거리를 얻으려고 이렇게 멀리 따라왔구나 싶어 마음이 안쓰러웠다.

검둥이가 빵을 다 먹었을 즈음 길 저편으로 나의 차와 똑같이 생긴 지프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검둥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그 차를 쫒아가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궁금하여 달려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지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는 나에게 ‘짜이’를 가져다 준 아이가 검둥이 이야기를 하였다.

검둥이는 이 년 전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강아지가 젖을 뗄 무렵 다른 도시에 사는 상인이 새끼 전부를 데리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차가 내가 타고 온 차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새끼를 잃어버린 검둥이는 그 후 같은 모양의 지프만 보이면 멈출 때까지 쫒아 다닌다고 하였다. 자식을 향한 마음은 짐승이라고 다르겠는가. 그 사연을 듣자 마치 나의 가슴으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찌릿해져왔다.

오랫동안 동물들의 모습을 즐겨 촬영하다보니 새끼와 어미가 얽힌 슬픈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새끼를 잃어버리거나 죽으면 바로 체념을 해 버린다. 그런데 이 년 동안 새끼를 잊지 못하여 찾아다닌다는 사연은 신기하고도 감동적이었다. 안타까운 생각은 들었지만 지프가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방법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이야기를 끝낸 아이는 5루피의 팁을 요구하였다. 지갑에서 20루피를 꺼내주며 나머지는 검둥이가 보이면 가끔 빵조각이나 챙겨주라고 하였다. 아이에게 한 부탁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단지 부스러기라도 몇 번은 던져줄 것이다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빗줄기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젖은 머리칼 사이엔 노란 리본이 선명하다. 여인의 어깨는 간헐적으로 들썩이고 있다. 슬픔을 머금은 세찬 비는 속절없이 옷 속을 파고든다. 희뿌연 바다를 향해 돌아서있던 그녀가 눈을 감고 나지막이 아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어느새 주변은 환해지고 그녀 앞에는 미소를 머금은 아이가 서 있다. 아이의 입은 닫힌 듯 보였으나 왠지 “흠, 흠”하는 잔기침 소리까지 들려온다.

“배고프지 않으냐?”

“춥지는 않으냐?”

‘엄마! 배고프지 않아요, 춥지도 않아요, 걱정 마세요.’

‘비도 오는데 그만 들어가세요.’

“애야! 이까짓 비 맞는 것이 무슨 대수냐.”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은 그녀는 정신도 놓은 듯 보인다. 누구를 붙잡고 어떻게 하소연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알 수 없다. 알 필요도 없다. 언제쯤이면 잊어질까. 얼마나 지나면 봄꽃에 웃음이 날까. 구천을 헤매는 자식의 영혼에 이별의 입맞춤이나마 할 수 있다면……. 원망도 내려놓고 미움도 내려놓으리라.

“나오너라, 이놈아! 빨리 나오거라.”

품을 떠난 지 백 일이 지난 오늘도 그녀는 철썩거리는 바다를 향해 외치고 있다. TV화면에는 슬픔이 가득차고 어둠이 내리고 있는 팽목항이 비친다. 나는 비몽사몽 눈을 감는다. 머릿속엔 검둥이가 지프를 따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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