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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읽기

보이지 않는 줄 / 고임순

부흐고비 2021. 4. 23. 08:42

어릴 적, 어머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졸졸 따라다녔다. 빨래터에는 비누통과 방망이를, 시장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잽싸게 어머니 뒤를 따랐다. 호기심 많던 나는 집 밖 세상이 사뭇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빨래한답시고 강물에 양말짝을 떠내려 보내는가 하면 옷을 다 적시고 눈총을 맞았다. 시장에 가서는 사방을 해찰하면서도 어머니를 놓칠까봐 치마를 붙들고 다녀 치마허리가 줄줄 허리까지 내려와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빙긋 웃으시며 엿이랑 인절미를 사주셨다.

이때 얼핏 어머니는 어미 소, 나는 송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따금 시골 들판에서 보았던 한 폭 그림 같은 풍경. 그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줄 하나가 어미 소와 새끼소를 이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머니와 나처럼, 떨어질 수 없는 줄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따라 가게 되는 것이라고. 그 줄은 생명이 있는 모든 동물의 마음속 깊이에서 우러난 사랑의 심지 같은 것이 아닐까.

나는 이렇게 보이지 않는 줄에 매여서 성장했다. 조부님, 부모님, 형제들과의 가족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스승과 친구들 간에도 이 줄로 이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여 남편, 시부모님, 시고모님, 시누이 등과 그 줄을 이어갔다. 그리고 태어난 아이들 하고도 깊어지는 사랑으로 그 줄들은 튼튼해지기만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힘의 정의가 반드시 유형적일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작용하는 힘, 그것이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 생기는지 이렇다고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러한 무형적 힘이야말로 참으로 강하고 질겨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임을 살아갈수록 절감했던 것이다.

저 유년 시절로 되돌아가 지금까지의 기억을 되살려보면 뚜렷이 남는 흔적이 아른거린다. 철이 들어서 아버지와 나 사이에 이루어진 사랑의 줄 하나를 발견할 때, 내 손에 붓을 쥐게 하고 붓글씨를 가르쳐주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사랑방 풍경과 함께 떠오른다.

그 줄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절대 요인이었다. 아버지와 나를 얽어놓은 줄, 그 줄의 강도가 내 힘을 능가하는 힘으로 작용해 주었기에 나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고 매래의 완성을 향한 과정에 놓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딸의 재능을 인정하시고 적극 이끌어주신 아버지. 그러한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나는 오늘날 까지 열심히 붓글씨를 썼던 것이다.

세상적인 유혹에 빠져 나태해질 때, 기로에 선 발길이 휴식만을 취하고 싶어 미끄러질 때 나를 요동하지 않게 붙들어 매어 준 줄, 공모전 낙선으로 실의에 빠진 딸을 격려해주시고 전시회 때마다 지팡이에 노구를 의지하고 오셔서 내 작품을 감상해주신 아버지.

남편 역시 한결같이 서(書)예술을 이해하고 힘껏 뒤를 밀어주었다. 수시로 먹을 갈아주기도 하며 격려를 아기지 않던 남편은 서예에 관한 서적을 구해주고 인사동에 연구실을 마련, 이 길에 전념하도록 배려해주었다. 그리고 전시회를 열 때마다 도록, 안내장, 포스트 등을 인쇄, 발송은 물론 작품 운반과 작품 거는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도맡아 주었다.

유난히도 길고 긴 여름이 누그러질 무렵, 나는 10번째 서화 개인전을 열었다. 2주기를 맞은 남편 추모전이었다. 그동안 정성들여 쓴 붓글씨와 그림을 들고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가슴 벅찬 감격이 북받쳤던가.

말하고 싶어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느낌들을 뭇으로 표현한 작품들을 한아름 껴안고 인사동 ‘백악미술관’에 풀어놓았다.

바로 이것이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애 그림을 보고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내 글씨를 통해 간절히 소통의 속삭임을 들었던 것이다.

전시회는 그 외로움과 속삭임의 결정체들을 앞에 놓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자리가 아니던가. 귀한 시간을 내어 찾아준 고마운 사람들, 나는 이슬 맺힌 눈으로 작품 도록과 서예기행문집을 선물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동분서주 혼자 뛰며 준비한 전시회, 1주일의 전시기간 내내 피곤이 누적되어 쓰러지려는 나를 지탱해준 따뜻한 손길이 있었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아버지와 남편의 사랑의 줄이었다.

땅에서 내가 꼭 잡았던 보이지 않는 줄은 하늘까지 닿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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